Update 2020.06.04 (목)

광산이씨(光山李氏) 한림공(翰林公) 영남파(嶺南派)

편집부 2020-04-24 (금) 16:29 1개월전 53  


경목당(성산면운성로773-12)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광산이씨(光山李氏) 시조(始祖) 이종금(李宗金)


근원조(根源祖)는 신라김씨(新羅金氏) 즉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시조인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며 신라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의 5세손 김일형(金日炯)이 고려 현종 1년(1010년)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솔선(率先)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 주군(州郡)의 장사들을 거느리고 강감찬(姜邯贊) 장군 휘하에서 거란족과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국가 주요문서와 비축식량을 숨겨 놓은 강화성(江華城)을 지켜 훈공(勳功)으로 고려 덕종 2년(1033년)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고 이종금(李宗金)으로 사성명(賜姓名)되니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광산(光山)이라 하였다.

(2) 광산이씨(光山李氏) 중시조(中始祖)


이종금(李宗金)의 7세손 이각(李慤)이 고려조에서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슬하에 순백(珣白), 숙백(淑白), 승백(升白) 3형제를 두게 된다. 3명의 형제들은 모두 학문에 뛰어나 광산이씨의 3대 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장남 순백(珣白)은 좌복야사공상서(左僕射司空尙書), 차남 숙백(淑白)은 한림원(翰林院) 직제학(直提學)을, 막내 승백(升白 직제학(直提學) 벼슬에 올라 광산이씨는 이들 3형제를 중시조(中始祖)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3) 영남선행삼용(嶺南善行三容)


①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낸 이수(李樹)가 33세에 합포(合浦 : 현재 마산) 병마절도영(兵馬節度營)에서 요절(夭折)하자 장남 이홍기(李弘器), 차남 이홍량(李弘量)은 12세, 삼남 이홍우(李弘宇)는 8세의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령에서 마산에 이르는 200여리의 길을 달려가 선영장지(先塋葬地)까지 운구(運柩)하여 치상(治喪)과 장례(葬禮)와 제례(祭禮)를 예법(禮法)대로 하여 어긋남이 없었고 지성(至誠)을 다하여 모부인(母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를 섬기고 형제효우(兄弟孝友)가 지극(至極)하니 세인(世人)들이 “영남선행삼용(嶺南善行三容)”이라 일컬았다. 이는 이홍기(李弘器)의 자(字)가 백용(伯容), 이홍량(李弘量)의 자(字)가 중용(仲容), 이홍우(李弘宇)의 자(字)가 계용(季容)인 것에 연유(緣由)한다.


②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이들 3형제와는 처남매부지간(妻娚妹夫之間)이다. 당시 정구(鄭逑)가 나이 21세가 되어도 장가를 들지 않자 형인 정곤수(鄭崑壽)가 서울 명문가에서 배필을 구하려했다. 이때 정구는 “나는 부귀한 집의 사위보다는(不願富貴婿) 효제(孝悌)하는 이씨의 집안에 장가들기를 원합니다(願入李氏門) 세 아들의 이런 행의(行誼)가 있는데 어찌 규방(閨房)에 법도가 없겠는가!(閨閫無範乎)” 하고는 부인(夫人)을 ‘이문(李門)’의 효제(孝悌)에서 취하였다는 유명한 일화(逸話)가 전한다.

(4) 광산이씨(光山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광산이씨는 27가구, 7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이홍기(李弘器), 이홍량(李弘量)의 후손은 성산면 고탄리에 세거하고 있고 이홍우(李弘宇)의 후손은 성산면 삼대리, 개진면 반운리에 산거하고 있다. 광산이씨 집성촌으로 유명한 대구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三狸里) ‘씩실마을’은 동호(東湖) 이서(李)가 고탄리에 이거한 후 형성되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高麗時代)


① 이숙백(李淑白)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각(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정의대부(正議大夫) 한림원(翰林院)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으로 한림공파(翰林公派) 파조(派祖)이다.


② 이순(李順)
초휘(初諱)는 윤화(允和)이고 일명(一名) 수(須)이다. 벼슬이 헌납(獻納)에 이르렀으나 안으로 역적의 무리가 날뛰고 밖으로는 해마다 왜구가 출몰하여 국정의 혼돈이 극에 달하였다. 우왕 11년(1385년) 풍해도(豐海道 : 현재 황해도) 안렴사(按廉使)로 봉직(奉職)하다가 광주(光州) 옛 별장으로 낙향(落鄕)하여 은둔(隱遁)하였으나 조정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로 누차 불렀으나 연로(年老)함을 빙자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세조 3년(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이 실패로 돌아가자 단종복위파(端宗復位派)에 가담한 이근생(李根生)은 관악산에서 형 이권선(李權先)과 이별하면서 ‘여형승지공증별시(與兄承旨公贈別詩)’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父子躋淸班(부자제청반) 부자가 청관(淸官)에 올랐으니
天恩是罔極(천은시망극) 임금의 은혜는 끝이 없네
白髮空傷時(백발공상시) 백발로 쓸쓸한 시절을 슬퍼하였고
丹心已報國(단심이보국) 단심으로 나라에 벌써 보답하였네
此身安所適(차신안소적) 이 내 몸 가는 곳 편안하네
相把涕漣泗(상파체련사) 서로가 붙들고 울면서 눈물을 흘리니
鶺鴒分明翩(척령분명편) 우애가 분명히 넘치어라”

(2) 그후 후환(後患)을 피하여 한성(漢城) 호현방(好賢坊 : 현재 명동 회현동 일대)에서 성주 소야방(所也坊) 고탄리 즉 성산면 고탄리로 이거(移居)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朝鮮時代)


① 이홍기(李弘器)
자는 백용(伯容)이며 호는 용재(容齋)이다.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 수(樹)와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 우(佑)의 따님인 안인(安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동생 홍량(弘量)과 함께 쌍둥이로 중종 26년(1531년) 태어났다. 선조 1년(1568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그 뒤에 낙동강 변에 작은 집을 짓고 매부인 정구(鄭逑)와 김우옹(金宇顒), 김면(金沔), 이기춘(李基春), 오건(吳健), 최영경(崔永慶) 등 당대의 명현과 사귀며 학문을 논하였다. 선조 15년(1582년) 9월 7일 졸(卒)하였다. 숙종 4년(1678년)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② 이홍량(李弘量)
자는 중용(仲容)이며 호는 육일헌(六一軒)이다.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 수(樹)와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 우(佑)의 따님인 안인(安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백형 홍기(弘器)와 함께 중종 26년(1531년) 태어났다. 선조 1년(1568년)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형과 함께 입격(入格)하여 유일(遺逸)로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선조 22년(1589년) 5월 공을 비롯하여 옥산(玉山) 이기춘(李基春),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한강(寒岡) 정구(鄭逑), 송암(松菴) 김면(金沔), 대암(大庵) 박성(朴惺)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등 당세명현(當世名賢)과 개진면 개산포(開山浦)에서 성산면 삼대리 사망정(四望亭)에 이르는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 7자로 분운(分韻)하여 시를 지었으니 이들을  ‘낙강칠현(洛江七賢)’이라 한다. 임진왜란 중에 병화를 피해 식솔을 이끌고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상촌(上村) 속칭 살목골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화살촉(箭鏃 : 전촉)을 만들어 김면(金沔) 장군에게 공급하던 중 선조 25년(1592년) 졸(卒)하였다. 숙종 4년(1678년)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③ 이홍우(李弘宇)
자는 계용(季容)이며 호는 모재(茅齋) 또는 낙빈(洛濱)이다. 훈련원(訓鍊院) 봉사(奉事) 이수(李樹)와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을 지낸 우(佑)의 딸인 안인(安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중종 30년(1535년) 태어났다. 중형(仲兄) 홍량(弘量)과 함께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에서 숭앙(崇仰)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이 창의(倡義)하자 성주지역의 모병관(募兵官)으로 널리 충의지사(忠義志士)를 모았다. 선조 25년(1592년) 7월 9일부터 7월 10일 사이에 치루어진 ‘안언(安彦) 전투’에서 의병대장(義兵大將) 정인홍(鄭仁弘)의 휘하에서 이부산(伊傅山 : 현재 의봉산)에 주둔하였던 공의 군사는 합천(陜川), 초계(草溪), 성주(星州), 고령(高靈)의 군사들과 합세(合勢)하여 왜적 400여명을 섬멸(殲滅)하는 대전과(大戰果)를 올렸고 선조 25년(1592년) 9월 12일 밤에 공의 군병(軍兵)이 무계(茂溪)의 왜막(倭幕)에 불을 지르니 적이 삼동동(三同洞 : 현재 다산면 송곡리 다산2산업단지) 산상(山上)에 진(陳)을 치거늘 강양(江陽 : 현재 합천)과 고양(高陽 : 현재 고령)의 군사가 합세하여 치니 왜병이 현풍방면으로 도망하였다. 사간원(司諫院)이 재능이 수령(守令)이 될 만한 자를 조정에서 등용하고자 30명을 천거할 때 공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선발되어 진천현감(鎭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선조 27년(1594년) 졸(卒)하였다.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와 성산면 고탄리 봉양원사(鳳陽院祠)에 배향되었다.


④ 이서(李)
자는 이직(以直)이고 호는 동호(東湖)이다. 진사(進士) 모재(茅齋) 홍우(弘宇)와 참봉(參奉) 개(漑)의 따님인 진양강씨(晋陽姜氏) 사이에서 명종 21년(1566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인이며 문학(文學)과 행의(行誼)로 사림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선조 30년(1605년) 진사(進士)로 뽑히고 서황산찰방(署黃山察訪)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스승인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권신(權臣)의 배척을 받아 향리로 돌아가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성주에서 스승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면서『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편집하였다. 광해군 9년(1617년)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건의하는 상소문(上疏文)을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작성하고 문인을 대표하여 공의 이름으로 보냈다. 광해군 12년(1620년)에 고모부(姑母夫)인 한강(寒岡) 선생이 운명(殞命)하매 심상(心喪) 3년을 복(服)하고 창의(創議)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과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건립(建立)하고『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과『한강유사(寒岡遺事)』를 저술하니 동문(同門)의 여러 현자(賢者)들이 공자(孔子) 문하의 유약(有若)에 견주었다. 또한 선생의 문집(文集)인『한강집(寒岡集)』간행(刊行)에도 전심(專心)하였다. 인조 4년(1626년) 사축서(司蓄署) 별제(別提)를 제수(除授)받았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왕(王)을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가 되었고, 인조6년(1628년)에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이후(以後) 논공읍 삼리1리 ‘씩실’ 승호(承湖)에 동호학당(東湖學堂)을 세워 동호야로(東湖野老)라 자호(自號)하고 후학(後學)을 교회훈도(敎誨訓導)하였다. 효종 1년(1650년) 통정대부(通政大夫) 대호군(大護軍)에 배수(拜受)되었다. 효종 2년(1651년) 졸(卒)하였다. 문인(門人)들이 사시(私諡)하여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하였다. 영조 33년(1757년)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에 추향(追享)되었다. 저서 동호집(東湖集)이 전한다. 탁남(濁南)의 영수(領袖)이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허적(許積)이 공의 사위이다.

(註釋) 공자(孔子) 문하의 유약(有若)에 견주었다.
공자(孔子) 사후(死後) 제자들이 공자님과 비슷한 언행과 학식을 닮은 유약(有若)을 공자님 대신으로 섬기려 했듯이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사후(死後) 동문제현(同門諸賢)들이 동호(東湖) 이서(李)를 섬기고 기렸다는 뜻이다.

 
⑤ 이명용(李命龍)
자는 자신(子信)이며 호는 낙촌(洛村)이다. 고탄(高灘) 로()와 부사(府使) 염(念)의 따님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선조 3년(1570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인이며 심경학(心經學)에 탁월하였다. 선조 37년(1604년) 공을 비롯한 영남유림 69명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5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렸다. 벽에 무자기(毋自欺 : 자기를 속이지 말 것)·신기독(愼其獨 : 그 홀로를 삼간다)을 써서 걸어두고 자성(自省) 하였고 과거공부를 폐하고 덕을 쌓으며 은거하였다. 선조 39년(1606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인조 4년(1626년)  향년 57세로 졸(卒)하였다. 문집으로 낙촌일고(洛村逸稿)가 전한다.


⑥ 이광언(李光彦)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농암(聾巖) 또는 고산(孤山)이다.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증직(贈職)받은 난귀(蘭貴)와 직장(直長)을 지낸 사창(思昌)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사이에서 광해군 12년(1620년)에 태어났다. 자품(資禀)이 순수(純粹)하고 거지(擧止)가 응중(凝重)하며 효우지극(孝友至極)하여 부상모병(父喪母病)에 단지(斷指)로 정성(精誠)을 다하였다. 당숙(堂叔) 동호공(東湖公)에게 수업(受業)하였으며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효우학행(孝友學行)으로써 과연 도백(道伯) 즉 관찰사(觀察使)의 추천에 올랐고 낙동강 가의 아름다운 풍광(風光) 네 가지를 바라본다는 ‘사망정(四望亭)’이란 시를 지었다. 문집(文集)으로 농암일고(聾巖逸稿)가 있다. 숙종 24년(1698년)에 항년 79세로 졸(卒)하였다.


⑦ 이병회(李柄回)
 자는 응두(應斗)이고 호는 만회(晩悔)이다. 행은(杏隱) 호영(祜永)과 석유(錫裕)의 따님인 성주도씨(星州都氏) 사이에서 고종 2년(1865년) 태어났다. 족조(族祖)인 소암(小菴) 이종희(李宗熙)과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에게 수학(修學)하였다. 유림사회(儒林社會)에서 융숭(隆崇)한 학덕(學德)과 탁월한 경륜(經綸)으로 신망(信望)이 두터웠다. 1919년 파리세계평화회의(巴里世界平和會議)에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청원하는 한국유림(韓國儒林)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였다. 그후 일경(日警)에 검거돼 심한 악형(惡刑)으로 얻은 불치(不治)의 병으로 1927년 졸(卒)하였다. 정부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려 2009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고 공의 숭고한 애국충정을 기리는 ‘애국지사(愛國志士) 만회(晩悔) 광산(光山) 이선생(李先生) 추모비(追慕碑)’가 2013년 성산면 삼대리 사망정에 세워졌다.


(2) 근·현대인물


① 이달직(李達稷) : 성산면장, 안동시 내무국장
② 이달생(李達生) : 삼성전자 전무이사
③ 이달춘(李達春) : 삼성물산 사장
④ 이달해(李達海) : 영남대학교 교수, 공학박사
⑤ 이부곤(李富坤) : 공군사관학교 졸업. 대령 예편
⑥ 이태현(李泰鉉) : 이사관, 경주 부시장. 고령군 부군수
⑦ 이대곤(李大坤) : 고등학교장. 문경교육청 교육장
⑧ 이곤호(李坤浩) : 보건복지부 부이사관
⑨ 이영현(李永鉉) : 서울대 의대 졸업. 동국대 교수. 동국대 경주병원 병원장
⑩ 이원덕(李源德) : 변호사
⑪ 이원구(李源求) : 행정고시 합격, 산업자원통상부 근무
⑫ 이곤정(李坤禎) : 창원 MBC 보도본부장
⑬ 이우람(李우람) : 미국 보스턴 법원 주임검사
⑭ 이대현(李大鉉) : 서울대 치대 교수
⑮ 이호원(李浩遠) : 칠곡경북대 신경외과 과장, 교수.
⑯ 이해영(李海泳) : 리앤목특허법인 변리사
⑰ 이원종(李源鍾) : 영남의료원 경상병원장
⑱ 이원욱(李源旭) : 영주신경외과 원장
⑲ 이강석(李强錫) : 중앙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

​자료제공 : 후손 모재(茅齋), 해도(海島),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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