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10.18 (금)

여주이씨(驪州李氏) 명곡정(明谷亭)

주간고령 편집부 2019-08-23 (금) 14:05 1개월전 64  


명곡정(대가야읍 중화1길 88-2)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명곡정(明谷亭) 유래(由來)

(1) 이 건물은 중화1리 화갑마을회관에서 주산임도를 따라 900여m 올라가면 우측 도로변인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435번지(중화1길 88-2)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명(亭子名)을 명곡(明谷)이라 이름한 것은 영천(靈川 : 고령)에 사는 여주이씨(驪州李氏)가 그 선조 수문장겸사복시정(守門將兼司僕寺正) 휘 경령(景齡)을 위하여 이 정자를 세웠는데, 수문장겸사복시정공(守門將兼司僕寺正公)의 묘소가 당시 중화리 명곡(明谷 : 때밝골)에 있었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2) 1958년 4월 18일 반룡(용2리), 일량, 읍내, 화갑 등에 세거하고 있는 여주이씨(驪州李氏) 제족(諸族)들이 문중회의를 열어 임진왜란 때 전공(戰功)을 세워 수문장겸사복시정(守門將兼司僕寺正 : 정 3품)에 제수(除授)되었고 중화리 일대의 감나무골(木谷)에서 메봉고개(馬峰峴)까지를 경계로 하는 토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下賜)받았던 휘 경령(景齡)을 추모하기 위하여 재궁(齋宮)을 세우기로 결의하여 1959년 2월 15일 명곡정(明谷亭)을 건립하였다.

(3) 명곡정(明谷亭)은 대명(大明) 만력(萬曆) 43년 즉 광해군 7년(1615년) 창립(創立)하여 수차례 중수(重修)하였던 고령향청(高靈鄕廳) 향사대(鄕射臺)의 임옥(林屋 : 숲 속 집)을 여주이씨 문중에서 1959년 2월에 매입(買入) 및 파철(破撤)하여 세웠다. 참고적으로 고령향청(高靈鄕廳)은 조선시대 고령현감을 자문(諮問), 보좌(補佐)하였던 자치기구(自治機構)이며 향사대(鄕射臺)는 향청(鄕廳)의 좌수(座首)·별감(別監) 등 향대부(鄕大夫) 등이 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루었던 건물을 말한다.


(4) 명곡정(明谷亭)에는 충의부(忠義府) 도사(都事)를 지낸 퇴산공(退山公) 휘 재윤(載胤)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지었던 퇴산정(退山亭)의 편액(扁額)과 1922년 문중에서 집안 자녀들의 학문을 수학하기 위하여 1922년 건립한 구목재(九睦齋)의 편액(扁額)이 명곡정(明谷亭)의 좌측과 우측에 걸려 있다.

2. 건축형태

건물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전면으로 길게 4칸은 마루를 놓고 후면으로 길게 4칸은 온돌방을 만들었다. 마루에는 현액(懸額)과 기문(記文) 4개가 남아 있다. 문간채는 솟을지붕의 3칸이며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3. 추숭인물(追崇人物)

자는 인로(仁老)이며 호는 의암(義巖)이다. 효행(孝行)이 남달랐던 처사(處士) 장(璋)의 둘째 아들로 중종 26년(1541년)에 고령군 대가야읍 헌문리에서 태어났다. 중시조(中始祖)는 붓 한 자루로 민족의지(民族意志)를 일깨우고 고종 19년(1232년) 몽고 도황제(都皇帝)에게 올리는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보내 수십만의 몽고군(蒙古軍)을 철병(撤兵)케 하였던 고려 최고 문장가(文章家)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이며 7대조는 고려광복(高麗光復)을 위하여 항전(抗戰)하다가 순절(殉節)하여 천추(千秋)에 길이 빛나는 의열(義烈)의 표상(表象)으로 흠앙(欽仰)받는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이다. 소년시절부터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고 용력(勇力)이 출중(出衆)하였으며 무예(武藝)를 익혀 그 솜씨가 비범(非凡)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향병(鄕兵)을 모집한 후 경상우방어사(慶尙右防禦使) 조경(趙儆) 휘하에서 돌격장(突擊將)으로 활약하던 정기룡(鄭起龍)의 군진(軍陣)으로 달려가 관군(官軍)이 되었다.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등 창의군(倡義軍)과 긴밀한 협조를 이루면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제1차 진주성전투(晋州城戰鬪), 사천(泗川), 단성(丹城) 등 각종 전투에 참전(參戰)하여 소수(少數)의 정예(精銳) 병력(兵力)을 이끌고 지형(地形)을 이용한 매복전술(埋伏戰術)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진주(晋州) 아동령(峨東嶺) 싸움에서 병사를 인솔하고 매복전술(埋伏戰術)로서 활을 쏘아 크게 전공(戰功)을 세우니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군주(軍酒)를 권하며 공의 용맹스러운 무용(武勇)을 칭찬하기를 아끼지 않았으며 아장(亞將)으로 삼고 작전계획(作戰計劃)을 수립하여 상호 논의(論議)하는 군무(軍務)인 찬획(贊劃) 업무를 관장하는 작전참모(作戰參謀) 역활을 수행한 것으로 연조귀감(掾曹龜鑑)에 기록되어 있다. 거창으로 이동하는 적의 대군을 맞아 진주(晋州), 단성(丹城 : 현재 산청 지역), 삼가(三嘉) 둥지에서 치른 복병전(伏兵戰)에서 많은 전과(戰果)를 거두어 조정의 은전(恩典)을 입었다. 조선왕조 개창(開創)시 불복지신(不服之臣)의 후예로서 갖은 고초를 겪어 신분(身分)이 강속(降屬)되었으나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주청(奏請)으로 왕명(王命)이 내려져 고려시대 잠영세족가문(簪纓世族家門)의 명예(名譽)를 되찿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정조 1년(1777년) 이진흥(李震興)이 지은 연조귀감(掾曹龜鑑)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거창(居昌)의 우척현전투(牛脊峴戰鬪)에서 불리한 지형(地形)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략전술(戰略戰術)로 왜적(倭敵)의 예봉(銳鋒)을 꺾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발에 부상(負傷)을 당하니 조정에서 두 번째의 포상(褒賞)으로 정5품의 낭관(郎官) 벼슬을 내려 그 전공(戰功)을 치하(致賀)헀다. 이와 같이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전세(戰勢)가 승기(勝機)를 굳혀 갈 무렵에 남강(南江)과 낙동강(洛東江)의 합류지점(合流地點)에서 기강전투(岐江戰鬪)가 일어났다. 김해(金海)에 주둔한 왜적이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창녕(昌寧)과 초계(草溪) 등지로 이동하는 것을 공격하라는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의병장(義兵將) 이대기(李大期)와 합세(合勢)한 후 팔계(八溪 : 합천군 초계)의 창진(蒼津)에서 대적(對敵)하게 되었다. 세찬 바람이 일어 모래가 날고 나뭇가지가 꺾이는 악천후(惡天候) 속에서 왜선(倭船)을 수장(水葬)시켰는데, 한 왜장(倭將)이 육지(陸地)로 달아나는지라 공이 칼을 빼어 들고 육박(肉薄)하니 어디선가 유탄(流彈)이 날아와 공의 머리를 맞히었다. 진중(陣中)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7세이었다. 그 용맹(勇猛)과 기개(氣槪)는 오히려 살아 눈은 왜적을 행해 부릅뜬 채였다. 왜적이 물러난 후 정기룡(鄭起龍) 장군은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문 채 손수 시신(屍身)을 염습(殮襲)하여 군현(郡縣)으로 하여금 고향집으로 모시게 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그 전공(戰功)을 조정(朝廷)에 상주(上奏)하여 수문장겸사복시정(守門將兼司僕寺正)으로 세 번째 포상(褒賞)을 하였다. 또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鄭起龍)의 주선(周旋)으로 군례(軍禮)에 따라 예장(禮葬)하였고 사패지(賜牌地)로 고령군(高靈君) 대가야읍 중화리의 감나무골(木谷)에서 메봉고개(馬峰峴)까지를 경계로 하는 임야(林野) 육겸두(六鎌頭)를 하사(下賜)받았으며 3년간의 제수미(祭需米)를 받아 치제(致祭)하였다. 공의 묘소가 있는 산의 본명(本名)은 진전(榛田 : 개암나무산)이었으나 사패지(賜牌地)로 임야(林野)를 하사(下賜)받아 이곳에 공을 안장(安葬)한 후에는 후인(後人)이 시명곡산(時明谷山 : 때밝골산)이라 불렀다. 선조 36년(1603년) 1월 3일 공의 전공(戰功)을 기려 “충효문(忠孝文)”을 하사받았으나,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었다. 공의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 산74번지 해좌(亥坐)에 있으며 사재감(司宰監) 참봉(參奉)을 지낸 유경민(兪景敏)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기계유씨(杞溪兪氏)와 합폄(合窆)으로 모셔져 있다.

4. 명곡정(明谷亭) 상량문(上梁文)

다음과 같이 서술(敍述)하노라. 하늘이 만일 어지러운 때에 거인(巨人)을 내릴 뜻이 있다면 땅은 마땅히 순박한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새로운 정자를 세워 이름을 전하게 할 것이다. 조용한 곳 나의 천석(泉石 : 산수의 경치)에서 이에 국(羹)에도 나타나고 담장(墻)에도 나타나도다. 삼가 듣건대 여주이씨(驪州李氏)의 선대(先代)는 실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은 문벌(門閥)이니 어찌 지위가 낮은 고을의 관리가 되겠는가? 아마도 이런 까닭으로 성조(聖朝 : 당대의 왕조를 백성이 높이어 일컫는 말)에서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사복시정공(司僕寺正公 : 휘 경령)은 집안의 선(善)을 본받은 후손으로 세상에 드문 뛰어난 선비이다. 어려서 가학(家學)을 전수(傳受)받아 바른 도리를 복습(復習)하였고 자라서는 칼 쓰고 말 타는 것을 좋아하여 남다른 자질을 인정받았다. 지난날 선묘조(宣廟朝)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여러 번 교활(狡猾)한 오랑캐들이 날뛰는 혼란한 때를 만나서는,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제공(諸公)의 마음을 결합하여 전란(戰亂)을 쓸어 없애려는 데 뜻을 간절히 하였고, 의분(義憤)을 떨치고 병사(兵使)의 진영에 달려 나아가 전쟁터를 치달리는 데 몸을 허여(許與)하였다. 진주(晉州)와 사천(泗川)의 사이에서 매복하여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어찌하여 계강(溪江)가에서 접전(接戰)을 벌이다가 갑자기 탄환에 맞게 되었단 말인가? 초혼(招魂)의 의식을 행한다고 슬퍼하지 말게, 본디 말가죽에 쌓여 돌아오겠다고 맹세한 뜻이 있었다네. 장한 공적 대궐에 알려지자 조정에서 향인(鄕人)을 면하게 하여 공훈(功勳)을 기록하였고 의로운 몸 고향에 돌아오자 모두 상여(喪輿)를 호송(護送)하고 부의(賻儀)를 보내었다. 돌아보니 한 구역 명곡(明谷)에는 포상(褒賞)이 상도(常度 : 정상적인 법도)에 지나친 것을 생각하고 늠름(凜凜 : 의젓하고 당당함)하여 백세(百世 : 오랜 세대)토록 고상한 기풍(氣風)은 윤강(倫綱 : 오륜과 삼강)이 실추(失墜)되지 않음에 힘입음이 있다. 이는 떳떳한 본성(本性)에 함께 사모하는 바인데 어찌 어진 후손이 선대의 유업(遺業)을 계승하는 당(堂 : 집)이 없겠는가. 이곳은 땅이 좁아 아쉽지만
갑재(甲齋)를 넓혀서 규모를 늘였고 오직 좋은날 이곳에 터를 잡아 남향을 정하여 법도(法度)에 맞게 세웠다. 일이 커서 공사를 마치기 어려웠는데 사민(四敏)군이 정성을 다하여 공사를 감독하였고 세대가 멀어 자취를 잃어버렸는데 규원(圭元)씨가 행적(行蹟)을 기술(記述)하여 집안에 전하였다. 톱질하고 도끼질하여 서까래를 만들고 들보를 만들었으니 목수가 솜씨를 다하였고, 여기에서 노래하고 여기에서 읊조리며 여기에서 거처하고 여기에서 머무니 비로소 처마가 새로워짐을 보겠도다. 산천은 멀리 들창을 보호하여 모두 명승지(名勝地)라 일컫고, 꽃나무는 마을에 서로 이어져 천륜(天倫)을 펼칠 만하다. 이에 축하하는 잔치의 노래를 본받아 들보 올리는 일을 돕는다.

여보게들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
낙동강 차갑고 푸른 물 시야에 들어오네
이와 같이 밤낮으로 흘러 쉬지를 않으니
도체(道體)는 원래 이것과 같은 것이라네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
우뚝 솟은 미악(眉嶽 : 높은 산)은 푸른 안개 떨구네
맑은 기운 돌고 돌아 군진(郡鎭)이 되었고
정기(精氣)를 길러 몇 분의 호걸(豪傑) 모았던가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
장군산 우뚝하여 하늘과 나란하네
장군(안동장군 휘 미숭)이 한 번 간 뒤 물을 곳 없지만
뛰어난 명성(名聲) 있어 아직도 낮지 않네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
만 길되는 가야산이 푸르게 발에 들어오네
고운(孤雲 : 최치원)이 옛날 어느 때 이곳에 은거했던가
자욱한 구름 깊고 깊어 지난 자취 아득하네

들보 위에 떡을 던지세
붉은 해 중천(中天)에 떠 찬란하게 빛나네
그 옛날 의리 지킨 마음을 생각하니
천추(千秋)에 누가 우러러 흠앙(欽仰)하지 않으랴

들보 아래에 떡을 던지세
화계(花溪) 세차게 흘러 눈 앞에 쏟아지네
흐리면 발을 씻고 맑으면 갓끈 씻으니
이 세상 무엇이 스스로 초래하는 것 아니랴

삼가 바라건데 들보를 올린 뒤에는 선비의 기상(氣像) 바람처럼 떨쳐 일어나고 요사(妖邪)한 기운 날로 사라지게 하오며 조상이 남겨준 아름다운 계책(計策)을 생각하여 후손들이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방법에 힘쓰게 하옵시며, 이 방에 들어가 충의(忠義)를 강론(講論)하며 후인들 높이 경모(景慕)하는 마음을 붙이게 하옵소서

경자년(1960년) 4월 성산 이기윤(李基允)이 삼가 짓다. 

(註釋1) 국에도 나타나고 담장에도 나타나도다
선조를 사모하는 것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지극히 사모하니 앉으면 요 임금의 모습이 담(墻 : 담 장)에 나타나 보이고 음식을 대하면 국(羹 : 국 갱)에 나타나 였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後漢書 卷63 李固列傳>
(註釋2) 초혼(招魂)의 의식을 행한다
죽음을 일컫는 말이다.
(註釋3) 말가죽에 쌓여 돌아오겠다
전쟁터에서 싸우다 남자답게 죽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는 변방의 들판에서 쓰러져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돌아와 땅에 묻히는 것이 마땅하다. 어찌 침상위에 누워 아녀자의 손에 맡겨서야 되겠는가(男兒要當死於邊野 以馬革裏屍還葬耳 何能臥牀上在兒女子手中邪)”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後漢書 卷24 馬援列傳>
(註釋4) 꽃나무는 마을에 서로 이어져 천륜(天倫)을 펼칠 만하다.
친족끼리 모여 화목하게 살만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이 대종(代宗) 영태(永泰) 원년(765년) 봄 좌습유(左拾遺)에 제수되어 장안(長安)에 갔을 때, 원외랑(員外郞)으로 있는 어느 위씨(韋氏) 집안의 친족들이 꽃나무 밑에서 매번 술자리를 벌이고 단란한 모임을 갖는 것을 보고 <위원외가화수가(韋員外家花樹歌)>를 지어 찬양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岑參集 卷4 韋員外家花樹歌><近思錄 卷9 治法>
(註釋5) 이와 같이 밤낮으로 흘러 쉬지를 않으니
공자(孔子)가 일찍이 냇가에서 흐르는 냇물을 가르켜 이르기를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주야로 쉬지 않는구나<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도체(道體 : 도를 닦는 몸)의 본연(本然)을 감탄한 것이다. <論語 子罕>
(註釋6) 흐리면 발을 씻고 맑으면 갓끈 씻으니
속세(俗世)를 초탈(超脫)하여 고결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뜻한다. 어부가 굴원(屈原)과 헤어지며 노래하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孟子 離婁上><楚辭 漁夫> 

자료제공 : 사복시정공파(司僕侍正公派) 이순근(李順根), 이홍식(李洪植)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崔鍾東)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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