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07.22 (월)

광산이씨(光山李氏) 경목당(敬睦堂)

주간고령 편집부 2019-06-21 (금) 18:14 30일전 33  


경목당(성산면 운성로 773-12)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경목당(敬睦堂) 유래(由來)


(1) 경목당(敬睦堂)은 광산이씨(光山李氏) 삼처사(三處士) 용재(容) 이홍기(李弘器),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재(茅) 이홍우(李弘宇) 삼형제가 문중의 화목(和睦)과 공경(恭敬)의 의미에서 영조 16년(1740년)경 세운 재실(齋室)이다.
(2) 광산이씨(光山李氏) 삼처사(三處士)를 기리기 위해 헌종 13년(1847년)에 건립된 사당(祠堂)인 봉양사(鳳陽祠)와 아울러 봉양서원(鳳陽書院)을 이루었으나 그 뒤 봉양사(鳳陽祠)는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

2. 경목당(敬睦堂) 연혁(沿革)


(1)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 137번지에 위치한 삼처사(三處士)의 재사(齋舍)로 영조 16년(1740년)경 창건(建)하였다.
(2) 헌종 4년(1838년) 화재(火災)로 소실되어 중건(重建)하였다.
(3) 그후 퇴락(頹落)으로 인하여 1970년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1972년에 중건기(重建記)를 작성하고 2007년에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경목당(敬睦堂) 건물구조


(1) 정면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철제 난간을 두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1칸짜리 맞배지붕의 솟을대문인 정문이 있다. 경목당의 담장은 현대식 벽돌담으로 둘러져 있으며 왼쪽에 정문보다는 작지만 정문 형태인 맞배지붕의 조그마한 대문이 있다.
(2) 건물구조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목조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각각 방이 있는 구조로 대청은 2칸, 왼쪽 방 2칸과 오른쪽 방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측면의 반 칸은 전면 길이 방향으로 반 칸의 마루를 깔았다.

4. 경목당(敬睦堂) 입구 비석


경목당(敬睦堂) 입구에는 비석 2기가 있는데, 그중에 우측의 비석은 ‘동호이선생유허비(東湖李先生遺虚碑)’로 숭정병자후경진(崇禎丙子後庚辰) 즉 순조 20년(1820년) 5월에 건립하였으며, 광릉(広陵) 이만운(李万運)이 비문을 짓고, 8세손 이헌영(李憲永)이 글을 썼다. 좌측 편의 비석은 ‘3처사공 유허비(三處士公 遺墟碑)’로 숭정병자후무인(崇禎丙子後戊寅) 즉 인조 16년(1638년) 10월에 건립하였으며 우의정(右議政) 허목(許穆)이 찬(撰)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관징(李觀徵)이 글을 썼다. 

5. 삼처사(三處士)


(1) 이홍기(李弘器)
자는 백용(伯容)이며 호는 용재(容齋)이다.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낸 수(樹)와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 우(佑)의 따님인 안인(安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동생 홍량(弘量)과 함께 중종 26년(1531년) 태어났다. 선조 1년(1568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으며 동생은 홍량(弘量), 홍우(弘宇)이다. 삼형제가 모두 유행(儒行)으로 이름이 드러나 세상에서 ‘영남의 삼용(三容)’으로 불렀다. 그 뒤에는 낙동강 변에 작은 집을 짓고 매부인 정구(鄭逑)와 김우옹(金宇顒), 김면(金沔), 이기춘(李基春), 오건(吳健), 최영경(崔永慶) 등과 사귀며 학문을 논하였다. 선조 15년(1582년) 9월 7일 졸(卒)하였으며 묘는 고령군 성산면 고탄 재궁동 선고비(先考妣) 동반(東畔) 간좌(艮坐)에 있다. 숙종 4년(1678년)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배향되었다.
(2) 이홍량(李弘量)
자는 중용(仲容)이며 호는 육일헌(六一軒)이다.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낸 수(樹)와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 우(佑)의 따님인 안인(安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백형(伯兄) 홍기(弘器)와 함께 중종 26년(1531년) 태어났다. 선조 1년(1568년)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여 유일(遺逸)로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옥산(玉山) 이기춘(李基春),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한강(寒岡) 정구(鄭逑), 송암(松菴) 김면(金沔), 대암(大庵) 박성(朴惺)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등 당세명현(當世名賢)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선조 22년(1589년) 5월 개진면 개산포(開山浦)에서 성산면 사망정(四望亭)에 이르는 낙동강을 뱃놀이를 하며 만경창파욕모천(萬頃蒼波欲暮天 : 저녁 때 저무는 하늘에 한없이 넓고 푸른 물결) 7자(七字)로 분운(分韻)하여 시를 지었으니 이들을 낙강칠현(洛江七賢)이라 불렀으며 사망정(四望亭) 곁에는 2003년 5월에 제막된 ‘낙강칠현비(洛江七賢碑)’가 있다. 공이 하늘 천(天)을 자운(字韻)으로 지은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 隔濶良朋已半年(격활양붕이반년)
좋은 벗님 소식 없이 반년을 지났더니
淸江解后思無邊(청강해후사무변)
청강(淸江)에서 만난 감회(感懷) 반갑기 한이 없네
中流扣枻陶陶醉(중류구예도도취)
중류(中流)에 뱃전(舷板)을 치며 취흥(醉興)이 도도(陶陶)한데
不覺煙波物外天(불각연파물외천)
자욱한 연파(煙波)속의 선경(仙境)인줄 몰랐도다.

(註釋) 연파(煙波)
멀리 연기(煙氣)나 안개가 부옇게 잔뜩 낀 수면(水面)
(註釋) 선경(仙境)
경치(景致)가 신비(神祕)스럽고 그윽한 곳

선조 25년(1592년) 11월 8일 향년 62세로 졸(卒)하였으며 묘는 고령군 성산면 고탄 재궁동 선고비(先考妣) 서반(西畔) 간좌(艮坐)에 있다. 숙종 4년(1678년)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배향되었다.
(3) 이홍우(李弘宇)
자는 계용(季容)이며 호는 모재(茅齋) 또는 낙빈(洛濱)이다.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낸 이수(李樹)의 셋째 아들이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암(松菴) 김면(金沔)과 창의(倡義)하여 성주지역의 모병관(募兵官)으로서 널리 충의지사(忠義志士)를 모으는 한편 공의 일군(一軍)은 이부산(伊傅山 : 현재 의봉산)에 본거지(本據地)를 두고 안언(安彦)전투 및 무계전투(茂溪戰鬪) 등 수차례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또한 평소 학덕(學德)으로 중형(仲兄) 홍량(弘量)과 함께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에서 숭앙(崇仰)을 받았다. 공이 큰 바다 창(滄)을 자운(字韻)으로 지은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勝會欣來赴(승회흔래부)
 성대한 모임에 흔쾌히 다다르서
 扁舟萬頃滄(편주만경창)
 조각배에 몸을 실어 망경창파(萬頃蒼波) 거슬러니
 斜陽無限意(사양무한의)
 석양에 정겨운 흥취 다함이 없구려
 回首更微茫(회수갱미망)
고개들어 다시보니 망망(茫茫)한 장강(長江)만이 아득하구나.”

(註釋) 망경창파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 유일(遺逸)로 진천현감(鎭川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선조 27년(1594년) 10월 15일 향년 60세로 졸(卒)하였으며 묘소는 고령군 성산면 삼대동(三大洞) 후(後) 곤좌(坤坐)에 있다. 효제(孝悌)가 뛰어나 회연서원(檜淵書院)의 향현사(鄕賢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후손들이 공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철종 5년(1854년) 고령군 성산면 삼대리에 추원재(追遠齋)를 세웠다.

(註釋) 유일(遺逸)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인재등용책을 말한다.

6. 경목당(敬睦堂) 상량문(上樑文)
후손에게 청백(淸白)의 훈계(訓戒)를 남겼으니 이는 잘 살게 하려는 전통의 빛을 독실(篤實)히 드리워졌음이요. 선조를 받들고 효도를 생각하여 이에 재실(齋室)을 짓자고 상의(相議)가 되었다. 만인(萬人)이 바라보는 바요 일가(一家)의 경사(慶事)라. 이 서쪽을 향한 새 터는 낙남(落南)을 하셨던 옛 터를 마주본다. 옛 섬돌에 토끼가 노니 이곳이 5, 6세가 거처하던 땅이요 묵은 풀에 까마귀만 우니 수삼대(數三代)의 의관(衣冠)이 감춰진 곳 즉 묘지(墓地)이다. 안산(案山)은 절을 하듯 하며 높이 하늘의 맑은 기운을 삼키고 용호(龍虎 : 좌우 산등성이)는 진퇴(進退)를 하며 지기(地氣)를 멈춰 축적했다. 그래서 덕성(德星 : 현인을 비유함)이 일실(一室 : 한집안에 사는 가족)에 많이 모이고 의현(儀賢 : 조정에 나간 현인)이 우리 문중에서 얼마나 났는가? 선조를 받드는데 어찌 남을 시키리오 하셨던 황거(榥渠)의 남긴 뜻을 공경히 따르고 선조에게 박(薄 : 가볍게)하게 한 것은 심히 옳지 않다 하신 이천(伊川)의 이 말씀을 쫓으리라.
내(內)와 외(外)를 나누어 일을 맡게 하니 모든 반찬이 깨끗하고 넉넉하게 마련될 것이요 포주(庖廚 : 음식을 만드는 부엌)를 베풀어 놓고 유사(有司)를 정하니 누대(累代 : 여러 대)의 법도(法度)가 될 수가 있다. 근년(近年 : 지나간 몇 해 사이)에 수한(水旱 : 장마와 가뭄)이 겹침으로 인연(因緣)하여 점차 자손들이 빈한(貧寒)하게 되었다. 몸을 보전할 자산(資産)도 없어 한 바가지의 물, 한 상자의 옷도 마련을 못하니 어느 겨를에 예(禮)를 다스리겠는가. 제수(祭獸), 제어(祭魚)에 부끄럽게 생겼도다. 다시금 향화(香火 : 제사)를 올릴 계획을 세우고 삼사(三祀 : 세 번의 제사)를 합설(合設 : 한곳에 합쳐 설치함)하기로 의논을 정했고 재계(齋戒 : 부정한 일을 멀리하고 심신을 깨끗이 함)할 집을 두느니만 못하다 하여 몇 칸의 집을 짓기로 모의(謀議)를 같이 했다. 여러 해 동안 힘과 재물을 헤아려 보았고 봄으로부터 시작하여 땅을 살피고 일을 살폈다. 두공(斗拱 : 들보 위에 대는 짧은 나무), 짧은 기둥 등 옛 재목은 슬산(瑟山), 덕산(德産)에서 운반해 오고 봇장(들보), 서까래 같은 새 재목은 대곡(大谷), 금곡(金谷)에서 취해 왔다. 서민(庶民)들이 달려들어 하루가 못되어 이룩된 것은 아니지만 제손(諸孫)들이 모여 들어 끝내는 서두르지 않고 만들어졌다. 갑자기 당실(堂室 : 한 울타리 안의 여러 채의 집과 방)이 덩실하고 서까래도 번듯하니 오이 넝쿨 뻗어가듯 자손들에게 전해가리라. 감히 짧은 노래 불러서 긴 들보 올리는 것을 돕노라. 동(東)으로 보면 비봉산(飛鳳山)이 걸어오듯 주세(主勢)가 웅장하다. 귀신이 지켜두었다. 때를 기다렸으리, 정기(精氣)를 무궁토록 함축(含蓄)하도다. 서(西)를 보면 붉은 살구구름이 되어 나직이 숙였는데 무슨 것이 영대(靈臺 :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뜻으로, 마음을 이르는 말)는 영원히 없어지고 늙은 줄기 바람이 불어 쓸쓸함을 돕는고? 남(南)을 보면 뫼뿌리 웅긋쫑긋 봄바람이 생긴다. 강물이 감고 안아 진기(珍奇)한 기운을 안으니 이곳에 경남(梗楠 : 가시나무와 녹나무)이 숨어 있으리. 북(北)을 보면 송백(松柏) 이 푸르러 옛 빛이다. 삼현(三賢 : 삼처사)의 성효(誠孝 : 효성)부린 곳을 알려면 청컨대 좌우의 묘역을 보라. 위로 보면 푸른 하늘 하얀 해의 빛이 밝아라. 사군자(士君子 : 덕행이 높고 학행이 깊은 사람)도 마땅히 이래야 하는 것이나 도깨비에게 기롱(譏弄 : 속이어 희롱하거나 농락함)을 당할까 두렵다. 아래를 보면 연작(燕雀 : 제비와 참새)아 앞다투어 하례(賀禮 : 축하하여 예를 차림)를 하지 말라. 뒷날 젊은이들 번성해질 때 이곳서 돌아가기를 잊은 자도 있으리라. 엎드려 원하노니 상량(上樑)을 한 뒤에 터전은 천만년이나 탄탄하고 경사(慶事)는 집안에 넘치며 더욱 돈독한 기풍(氣風)을 일으켜 인자(忍字) 백(百)을 써가며 변하지 말고 모두가 향화(香火)를 받드는 데 공경하여 성심(誠心)을 하나로 모아 영원히 간직하자.
후손 여권(汝權)  삼가 지음
(註釋) 제수(祭獸), 제어(祭魚)에 부끄럽게 생겼도다
승냥이와 수달이 식량을 비축하기 위하여 짐승과 물고기를 많이 잡아 늘어놓는 것이 마치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다는 데에서 나온 말로, 《예기》 왕제(王制)에, “수달이 물고기를 제사 지낸다는 절기가 지난 뒤에야 산지기가 못에 통발을 설치하고, 승냥이가 짐승을 제사 지낸다는 절기가 지난 뒤에야 사냥을 한다.[獺祭魚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然後田獵(달제어연후우인입택량 시제수연후전렵)]”는 말이 보인다.

7. 경목당(敬睦堂) 당호(堂號) 등각(登刻) 후지(後識)


당(堂)의 현판(懸板)은 진실로 우리 모재부군(茅齋府君 : 휘 이홍우)의 5세손 시암공(時菴公 : 휘 이춘식)이 이어 기술(記述)하고 이름을 붙여 이 후손이 이 당(堂)에 출입한 자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궁금하여 감발(感發 : 감동하여 분발함)하고 바르게 하여 힘쓴다면 선(繕 : 고침)이 손으로 어루만지고 이에 읽힘이 어찌 한갓 그 자화(字畵)의 기술(記述)과 심법(心法 : 마음을 쓰는 법)의 바름이리오. 이에 드디어 그 종이가 오래되어 묵화(墨花 : 벼루에 스며 있는 먹의 빛깔)가 엉키고 흩어질까 두려워하여 손수 스스로 판자에 수놓아 중방(中枋 : 기둥과 기둥 사이의 벽 가운데를 가로질러 댄 나무)에 못질하니 이는 선(繕)의 구원(久遠 : 몹시 오래 됨)한 계획(計劃)이다. 아! 무릇 우리 종당(宗黨 : 종친)이 이 당(黨 : 일가) 모임에 누가 친척(親戚 : 친족과 외족)이 아니리오. 해마다 봉심(奉審 : 받들어 살핌)하고 해마다 보호하여 공경함에 그 선조를 공경한 정성을 다하며 화목함에 그 일가간에 화목하는 도리(道理)를 닦아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가 할아버지를 잇는다면 공경하고 화목하는 도풍(道風)이 천백대(千百代)에 이르더라도 썩지 않고 바꾸지 아니할 것인즉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우리 가문(家門)의 세덕(世德)의 연원(淵源)과 이 당(堂)을 창달(達 : 열다)한 전말(顚末 : 처음부터 끝까지 일이 진행되어 온 경과)은 시암공(時菴公 : 휘 이춘식)의 윤자(胤子 : 맏아들) 행와공(行窩公 : 휘 이사훈)의 기문(記文)에 자상히 실려 있으니 이제 반드시 상(床)을 포개지 아니한다.

(註釋) 경목당(敬睦堂) 당호(堂號) 등각(登刻) 후지(後識)
경목당(敬睦堂)의 당우(堂宇 :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호(號)를 판자(板子)에 새긴 후에 느낀 바를 기록함(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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