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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慶州金氏) 직장공파(直長公派) 향림정(香林亭)

주간고령 편집부 2019-05-25 (토) 16:01 3개월전 117  


향림정(대가야읍 지산길 51)

 

1. 향림정(香林亭) 및 김수옹(金守雍) 소개

기재(棄齎) 김수옹(金守雍)은 중종 8년(1513년) 고령 월기촌(月器村)에서 출생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중종 31년(153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재직하는 동안 관인(官人)과 백성으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다. 명종 즉위(1545년) 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합천군 가야면 숭산(崇山)에 은거하면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추모하는 삼수정(三樹亭)이라는 학당(學堂)을 짓고 경서(經書)를 가르침에 부근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여 들어 문풍(文風)이 진작되자 명종 3년(1548년) 고향으로 돌아와 대가야읍 지산동 47번지에 향림정(香林亭)을 창건(建)하여 강학지소(講學之所)로 삼아 재주에 따라 향리의 유생(儒生)들을 가르쳤다.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의 4가지 덕목(德目) 중 실천가능한 10조를 엄선(嚴選)하여 향약(鄕約)으로 계(稧)를 만들어 규약(規約)을 세우고 생활화(生活化) 하도록 힘껏 가르치니 향중(鄕中)이 모두 선생을 더욱 존경하였다고 전해진다. 명종 14년(1559년) 월기 재사(齋舍)에서 졸(卒)하였고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풍양조씨(豊壤趙氏)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 우암(寓巖) 선생 인규(仁奎)의 따님이다. 공의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지방 유림(儒林)의 공의(公議)로 영조 12년(1787년) 우곡면 사촌리에 소재한 영연서원(靈淵書院)에 추향(追享)되었다.

2. 향림정(香林亭) 연혁(沿革)

(1) 명종 3년(1548년) 대가야읍 지산동 47번지에 강학지소(講學之所)로 향림정(香林亭)을 창건(建)하였다.
(2) 헌종 14년(1848년) 퇴락(頹落)으로 인하여 향림정(香林亭)을 중건(重建)하였으며 중건기문은 철종 2년(1851년) 전 병조참의(兵曹參議) 김상직(金相稷)이 지었다.
(3) 광무 3년(1899년) 대가야읍 지산리 148번지(현재 장소)로 이건하였으며 상량문(上樑文)은 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가 지었고 이건(移建) 기문(記文)은 공조참의(工曹參議)·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을 지낸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지었다.
(4) 1962년 성산(星山) 이기원(李基元)이 근찬(謹撰)한 기재(棄齋) 선생(先生) 경주김공(慶州金公)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5) 2015년 향림정(香林亭)을 해체하고 신축하였다. 

3. 향림정(香林亭) 건물구조
 
입구에 솟을대문 3칸 삼문을 지나 2m 높이의 기단(基壇)을 쌓은 뒤 주춧돌을 놓고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기와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구조는 전면에 길게 한 칸 마루를 내었고, 우측 2칸, 좌측 1칸은 온돌방을 만들고 그 사이에 대청을 놓았다. 우측에는 최근에 지은 종중 회의실이 있다.

4. 향림정(香林亭) 원운(原韻) 시(詩)

地僻冒香洞(지벽모향동) 
땅은 궁벽하나 향기가 그윽한 마을이요
林深立我亭(임심립아정)
나무숲이 깊어서 나는 정자를 지었도다
風淸魚釣水(풍청어조수) 
고기 잡는 물가에 바람이 맑고
月白講庭(월백구마정)
강마하는 뜰에 달빛이 밝구나
琴谷歸鴻影(금곡귀홍영)  
금곡(琴谷)에는 기러기 그림자가 지나가고
仙菴唳鶴翎(선암려학령)
선암(仙菴)에는 학이 나래를 펼친다
寄身雲樹(기신운수찬) 
구름 낀 나무숲에 몸을 맡기매
興發百花馨(흥발백화형)
온갖 꽃 향기에 흥이 발하네

◉ 모산골 유래
향림정 원운 시의 첫 번째 구절의 모(冒) 자와 “나무숲이 깊다”에서 산(山)을 따고 고을 동(洞)자를 합하여 “冒山洞(모산동)”이라 불렀다. 지금도 冒山洞(모산동)으로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그곳에 못이 있어 池山洞(지산동)이라 표기가 되었다.

5. 향림정 이건기(香林亭移建記)

고령(高靈)의 향림정(香林亭)은 바로 기재(棄齋) 김수옹(金守雍) 선생이 강론(講論)하던 곳이다. 공은 기묘명현(己卯名賢) 충암(冲庵)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의 종조질(從祖姪)로서 문학(文學)과 기풍(氣風)을 대부분 가정에서 이어받았다. 어린 나이에 문과에 올랐지만 벼슬은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었으니 기묘당인(己卯黨人)이란 지목(指目)이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만났으니《주역(周易)》에서 말한 “군자는 기미(幾微)를 보고 일어나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즉 현명한 이는 시국(時局)의 기미를 살펴서 떠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되면 하루도 미적거리지 않고 즉시 떠난다는 말이다.〔君子 見幾而作 不俟終日〕”이것은 공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공의〈향림시(香林詩)〉에 이르기를,

風淸漁釣水(풍청어조수)
고기 잡는 물가에 바람이 맑고
月白講磨庭(월백강마정)
강마하는 뜰에 달빛이 밝구나
寄身雲樹攢(기신운수찬)
구름 낀 나무숲에 몸을 맡기매
興發百花馨(흥발백화형)
온갖 꽃 향기에 흥이 발하네

하였으니, 그 흉금(胸襟)의 맑고 평이한 기상(氣像)을 또한 웬만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강마(講磨)한다는 것은 어떤 도(道)인가? 일찍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두 선생의 풍모(風貌)를 사모하여 뜻이 같은 이들이 서당을 짓고서 먼저《소학(小學)》으로 기본을 세우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살펴본 뒤에 남전(藍田)의 향약(鄕約)을 시행하였으니 이 또한 기묘제현(己卯諸賢)들이 남긴 법도(法度)이다. 이 때문에 살아서는 남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세상을 떠난 뒤엔 그 사당(祠堂)에서 제사를 받았으니 고령(高靈) 오현사(五賢祠)에 공이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무성한 풀만 남은 황폐한 터에 후손이 옛 정자를 수리하고 온갖 꽃의 남은 향기를 아끼고 보호하니 이는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헌종 14년(1848년) 무신년(戊申年)에 중건(重建)한 기록은 이미 김상직(金相稷) 공의 기문(記文)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 후 50년 동안 지도(地道)가 끊임없이 변화하여 건물이 허물어지는 것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옛터의 서쪽 한 마장쯤 되는 곳으로 옮겨 세웠는데, 그 지세(地勢)가 트이고 높으며 그 규모가 증가되니 산이 더욱 높아지고 물이 더욱 맑아진 듯하다. 잠깐 둘러보는 사이에 조화(造化)의 기축(機軸)을 알선하여 천명(天命)의 길함을 이어 나가니 우리 고을의 붓을 잡은 선비라면 누구인들 흠앙(欽仰)하며〈장발(長發)〉의 송(頌)을 올리지 않겠는가. 지금 수원(秀瑗) 씨와 수용(秀鎔) 씨가 봉희(鳳熙)를 보내어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는데, 삼가 공이 가정(嘉靖) 19년 중종 35년(1540년) 경자년(庚子年)에 선성(宣城 : 예안의 옛 이름)의 수령으로 와서 우리 선조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였고 지금까지 자손들이 대대로 통가(通家 : 선대로부터 서로 친하게 왕래하며 사귀어 오는 집)의 우호(友好)를 이어 오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비록 형편없으나 어찌 아무 말 없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마음속에 느낀 바를 적고 이어서 사(辭)를 적는다. 사(辭)는 다음과 같다.

菀彼香林兮(원피향림혜)
울창한 저 향림이여
寒花之秋容歟(한화지추용여)
국화의 가을 자태로다
菀彼香林兮(원피향림혜)
울창한 저 향림이여
淸艶月明之中歟(청염월명지중여)
맑고 고운 자태 명월 중에 있구나
白香山爲詩豪兮(백향산위시호혜)
백향산이 뛰어난 시호였지만
我不願從遊(아불원종유)
내 따라 노닐기를 원치 않노라
向林之夸節兮(향향림지과절혜)
상향림과 같은 뛰어난 절개여
翳斯亭之特留(예사정지특류)
이 정자 그늘에 유독 머물러 있네
亭故翼翼而噲噲兮(정고익익이쾌쾌혜)
정자가 본래 우뚝하고 밝거니와
矧肯構而肯堂(신긍구이긍당)
자손이 잘 계승해 이루었음에랴
嗟荃蕙之爲茅兮(차전혜지위모혜)
아아, 향초가 띠풀이 됨이여
墜末路而悲傷(추말로이비상)
말로(末路 : 끝장)에 떨어져 슬프고 비통하네
擧酒杯而招招兮(거주배이초초혜)
술잔을 들어 애타게 혼을 부름이여
來觀夫留芳(내자관부유방)
여기 와서 남은 방초를 살펴보소
(註釋1) 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년~1521년)의 호이다. 중종 2년(1507년) 문과에 장원하고 정언(正言), 이조정랑(吏曹正郞), 순창군수(淳昌郡守),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註釋2) 남전(藍田)의 향약(鄕約)
북송 때 섬서성 남전(藍田)현의 여씨(呂氏) 4형제가 문중과 향리를 위해 만든 자치규약이었다. 남전향약이라고도 한다. 여씨향약에 다음과 같이 4대 덕목이 있다. ①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②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 주며(過失相規) ③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禮俗相交) ④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患難相恤)가 그것이다.
(註釋3) 지도(地道)가 끊임없이 변화하여
여기서는 세월이 흘러 땅 위의 모든 것이 변화해 가는 것을 말한다.
(註釋4) 장발(長發)의 송(頌)
장발(長發)은《시경》 상송(商頌)의 편명(篇名 : 서책의 이름)인데, 하늘과 선조(先祖)를 제사하는 대체제(大禘祭 : 임금이 조상의 신주를 합제(合祭)하는 큰 제사) 때에 부르던 송가(頌歌)이다. 여기서는 향림정(香林亭)이 중건된 것을 축원하는 글을 의미한다.
(註釋5) 국화의 가을 자태(姿態)로다
송나라 한기(韓琦)의 시〈구월수각(九月水閣)〉에 “농부의 가을빛 담담함 부끄러워 말고 늦가을 국화꽃 고운 향을 보아라.[不羞老圃秋容淡 且看黃花晩節香]”라고 하였다. 이는 만년의 절개가 고결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김수옹(金守雍) 이 만년에 고결한 절개를 지켰음을 칭송한 것이다.
(註釋6) 맑고 …… 있구나
송나라 양시(楊時)의 문집인《구산집(龜山集)》에 〈저궁관매기강후(渚宮觀梅寄康侯)〉라는 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성긴 꽃송이로 가벼이 눈과 다투지 말고, 맑고 고움을 밝은 달빛 속에 고이 간직하라.〔莫把疎英輕鬪雪 好藏淸月明中〕”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당시 호안국(胡安國)이 이 시를 받고 곧 관직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향림정(香林亭)의 주인인 김수옹(金守雍)이 세태(世態)를 미리 알고 관직을 그만두었던 것을 찬탄하는 의미로 쓰였다.
(註釋7) 백향산(白香山)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이다. 자는 낙천(樂天)이고 향산거사(香山居士)로 자호하였다.
(註釋8) 상향림(向林)
송나라 상자인(向子諲)의 호이다. 주희(朱熹)가 송나라가 위태로울 때 보여 준 그의 우뚝한 절개를 크게 칭찬하였다.
(註釋9) 정자가 …… 밝거니와
《시경》〈대아 면(綿)〉에 “판자를 묶어 이으니 지은 사당이 우뚝하구나.[縮板以載 作廟翼翼]” 하고, 〈소아 사간(斯干)〉에 “밝고 상쾌한 그 정면이요, 깊고 넓은 그 아랫목이로다.[噲噲其正 噦噦其冥]” 하였는데, 둘 다 건물을 짓고 쓴 시이므로 이를 인용한 것이다.
(註釋10) 향초가 띠풀이 됨이여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난초와 지초는 변하여 향기를 잃고, 전초와 혜초는 바뀌어 띠풀이 되었네.[蘭芷變而不芳兮 荃蕙化而爲茅]”라고 하여, 착한 사람들이 나쁘게 변한 것을 비유하였다.


자료제공 : 경주김씨 직장공파 종중 부회장 김영화(金永和)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崔鍾東)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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