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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노씨(江華魯氏) 한림공파(翰林公派)

주간고령 편집부 2019-04-20 (토) 19:38 2개월전 181  


강화노씨추원재 적산길67-6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강화노씨(江華魯氏) 시조(始祖) 노중련(魯仲連)
① 중국사기(中國史記)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편에 의하면 주(周)나라 초대 무왕(武王)은 동생인 주공희단(周公姬旦)을 곡부(曲阜)에 책봉(冊封)하여 노국노공(魯國魯公)으로 봉(封)하였으나 봉지(封地)에 가지 않고 자신의 형인 무왕(武王)을 보좌(補佐)하였다. 무왕이 일찍 타계(他界)하여 나이 13세 된 어린 조카가 제2대 성왕(成王)으로 오르니 어린 성왕을 보좌하지 않을 수 없어 봉지에 가지 못했다. 성왕 원년에 주공희단(周公姬旦)의 장남 백금(伯禽)을 대신 노나라 제후에 책봉하고 노국노공(魯國魯公)으로 봉하니 노(魯)나라 제1대 군주가 되었으며 ‘노씨(魯氏) 성(姓)의 연원(淵源)’이 되었다.
② 2013년 계사(癸巳)에 간행한 강화노씨(江華魯氏) 대동보(大同譜)에 의하면 “시조(始祖)는 서주(西周) 노(魯)나라 제1대 군주인 백금(伯禽)의 후손인 노중련(魯仲連)이다”. 노중련(魯仲連)은 약 기원전 305년에 태어나 기원전 245년에 졸(卒)한 제(齊)나라 사람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제(齊)나라 임치(臨淄)에 있었던 국립대학이며 수많은 학자나 학파가 자신들의 사상을 자유로이 논쟁하였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학술적 중심이었던 직하학궁(稷下學宮)의 대표적인 학자(學者)로 손꼽혔다. 그는 ‘일체변사(一切辯士)’ 또는 ‘종횡가(縱橫家)’로 불렸던 ‘유세가(遊說家)’ 중의 한 사람으로서 뛰어난 재능으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다양한 사상(思想)을 융합(融合)하고 또한 그것을 실천하였다. 진(秦)으로부터 침략을 받고 있는 여러 제후(諸侯)들에게 뛰어난 지략(智略)으로 해결해 주어 사례(謝禮)로 제후(諸侯)들이 봉지(封地)를 내리거나 천금(千金)을 내놓았으나 공은 “천하에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근심을 덜어주고 분란을 해소해 주면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았다. 의로움으로 인의(仁義)를 가볍게 여기고 무력이나 권모술수(權謀術數)로 공리(功利 : 공명과 이욕)만을 꾀하는 진(秦)나라의 패도(覇道)를 물리쳤다. 전국시대 각국에서는 공을 세기적 천하사(世紀的 天下士 : 세기 동안에 특이할 만하게 세상에 이름난 선비)라 호칭하고 극찬하였다고 중국 사기열전(史記列傳)에서 전한다.
(註釋) 일체변사(一切辯士)
어떤 경우에도 자유자재로 변론을 펼 수 있는 유세가(遊說家)를 말한다.
(註釋) 종횡가(縱橫家)
전국시대 외교정책의 두 축이었던 합종책(合縱策)과 연횡책(連橫策)을 논한 분파(分派)를 말하며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대표적 인물이다.
(註釋) 유세가(遊說家)
책사(策士 : 계책에 능한 사람)가 제후(諸侯)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기의 의견을 말하여 제후를 설복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종의 외교 전문가 또는 국제관계 전문 로비스트(lobbyist)를 말한다.


(2) 강화노씨(江華魯氏) 분파(分派)
크게 분류하면 첫째(伯派) 41세 노여(魯璵)를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둘째(仲派) 52세 송재공(松齋公) 노여(魯輿)를 파조로 하며 공의 아들 5형제 중 장남 노인호(魯仁好)는 병사공파(兵使公派), 차남 노인지(魯仁止)는 감사공파(監司公派), 삼남 노인복(魯仁復)은 한림공파(翰林公派), 사남 노인철(魯仁喆)은 현감공파(縣監公派), 오남 노인언(魯仁彦)은 감찰공파(監察公派)로 나누어지고 막내(季派)는 52세 노인도(魯仁道)를 파조로 하는 부사공파(府使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

(3) 강화노씨(江華魯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56세 장사랑(將仕郞) 세창(世昌)의 손자인 58세 낙애공(洛厓公) 삼(參)의 후손은 고령군 개진면 옥산2리 적산(笛山)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으며 세창(世昌)의 차자 희건(希騫)의 후손들은 고령군 개진면 광도리(廣道里), 성산면 사부리(沙鳧里) 등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②『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강화노씨는 34가구 74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 현조(顯祖)
(1) 기자조선(箕子朝鮮)시대
① 3세 노계(魯啓)
시조 노중련(魯仲連)의 손자로 기원전 222년 중국 제(齊)나라에서 우리나라 기자조선(箕子朝鮮) 애(哀) 왕조에 들어와 부교사도(敷敎司徒)가 되어 팔조지교(八條之敎)는 라는 법률인 ‘팔조법금(八條法禁)’과 주위의 8구획은 8호(戶)의 집에서 각기 사전(私田)으로서 경작하고, 중심의 1구획은 공전(公田)으로서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정부에 바치는 조세로 할당하는 ‘정전법(井田法)’을 거듭 시행하고 인륜도덕(人倫道德)을 계시(啓施 : 시행)한 위업(偉業)의 공덕(功德)으로 41대 애왕조(哀王朝) 기원전 195년에 갑비고차(甲比古次 : 현재 강화군)를 봉지(封地)로 받고 강화군(江華君)에 봉(封)해지니 ‘강화노씨(江華魯氏)의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노계공(魯啓公)이 선정(善政)과 대업(大業)을 남기고 승천(昇天)하니 조정(朝廷)에서는 우리나라 동방(東邦) 선정(善政)의 유덕(遺德)을 만대(萬代)에 기리는 애정으로 ‘시호(諡號)를 동정(東政)’이라 추서(追敍)하고 만조백관(滿朝百官)과 만백성(萬百姓)들의 한복(韓服) 저고리 옷깃에 백색(白色)단을 달게 하였다. 이로써 한복(韓服)의 동정(東政)이 오늘에 전습(傳襲)되었으니 여기에는 득관조(得貫祖) 노계공(貫祖 魯啓公)의 성훈(聖訓)이 담겨져 있음을 상징한다.
(2) 신라시대
① 28세 노충국(魯忠國)
당나라 천보(天寶 : 742년~756년, 현종 때 연호)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경덕왕 15년(756년) 신라(新羅)로 건너와 팔학사(八學士)가 되었다.


(3) 고려시대
① 40세 노수(魯洙)
예빈시(禮賓寺) 소경(少卿)을 지낸 노극(魯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종 15년(1137년)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신분으로 금(金)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다녀왔다. 인종 16년(1138년) 서경사람들이 묘청(妙淸)의 난에 가담한 적의 우두머리 최영(崔永) 등을 붙잡고 성을 나와서 항복하니 김부식(金富軾)이 병마판관(兵馬判官)인 공를 보내어 서경(西京) 평정(平定)의 승전(勝戰)을 알리는 표문(表文)을 올리니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제수(除授)받았다.
② 41세 노장(魯璋)
상서공(尙書公) 노수(魯洙)의 차남으로 예종 8년(1113년) 태어났다. 명종 4년(1174년)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으로 금(金)나라에 가서 횡선사(橫宣使)의 파견을 사례(謝禮)하였으며 그 후 4대 조(朝)를 내리 섬겨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③ 44세 노유(魯維)
충양공(忠襄公) 노용신(魯龍臣)의 아들로 명종 27년(1197년)에 태어났다. 충렬왕 33년(1307년) 용산별감(龍山別監) 재직 중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都僉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증직(贈職)되었다.
④ 45세 노충(魯种)
용산별감(龍山別監) 노유(魯維)의 아들로 고종 1년(1214년) 태어났다. 원종조에 전의정랑(典議正郞)으로 모평백(牟平伯)에 봉해졌고 몽고의 난에 공을 세워 강화군(江華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와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제수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⑤ 51세 노서(魯舒)
자는 화숙(和叔)이며 호는 경모(景慕)이다.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都僉議)에 증직(贈職)된 여당공(畬堂公) 노유례(魯有禮)의 아들로 충숙왕 6년(1337년) 태어났다.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초은(隱) 이인복(李仁復) 문인이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금헌(琴軒) 류방택(柳方澤)과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다. 공민왕 14년(1365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문하주서(門下注書)를 지냈다. 신돈(辛旽)이 왕사(王師 : 임금의 스승)가 되는 것을 반대하여 남원으로 귀양가니 정포은(鄭圃隱)께서 공의 충직(忠直)함을 간절히 고하여 신돈이 주살(誅殺)됨에 교지(敎旨)를 내려 검교참의(檢校參議)로 불렀으나 시사(時事)가 날로 그릇됨을 보고 광주(廣州) 선영 아래로 물러나니 당시의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다 이르기를 “유교(儒敎)에 큰 공이 있는 분은 오직 노경모(魯景慕)와 정포은(鄭圃隱) 뿐”이라 하였다. 우왕 12년(1386년) 졸(卒)하였다. 조정에서 예관(禮官)을 보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추증(追贈)하였으며 시호를 효간(孝簡)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몽학초정(蒙學初程)과 양친척이(養親斥異)가 있다.


⑥ 52세 노여(魯輿)
자는 덕운(德運)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다. 효간공(孝簡公) 노서(魯舒)의 아들로 공민왕 1년(1352년) 태어났다. 창녕부사(昌寧府使)를 지내고 우왕 14년(1388년) 현량과(賢良科)에 올라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전라도 성수산(聖壽山)아래 운수읍(현재 임실읍) 동쪽 20리쯤 상동면 관전촌(官田村)에 퇴거하여 서재(書齋)에 송재(松齋)라고 편액(扁額)한 것은 옛 도읍인 송경(松京)을 버리지 않음을 뜻한 것이라 하였다.


(4) 조선시대
① 53세 노인복(魯仁復)
초휘(初諱)는 인문(仁文)이고 자(字)는 정지(正之)이며 호는 이무당(二無堂)이다.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을 지낸 노여(魯輿)의 셋째 아들로 공민왕 22년(1373년) 태어났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창왕 1년(1389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공양왕 2년(1390년) 동진사(同進士)로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고려의 운수가 다되자 개성의 취령(鷲嶺 : 수리재) 아래 효자리(孝子里)로 물러가 벽위에 이무당(二無堂)이라 써 붙이니 곧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는 뜻이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차운(次韻)하기를「그대 있는 곳에 와서 그대의 시(詩)를 보니 우쭐대며 벼슬하던 내가 부끄럽네」하였다. 세종 14년(1432년) 졸(卒)하였다.
② 54세 노걸(魯杰)
자는 의백(儀伯)이고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노인복(魯仁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및 묘소는 미상(未詳)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집의공(執義公) 노승주(魯承柱)가 단종 1년(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인하여 정국(政局)이 혼미(昏迷)하자 고조 효간공(孝簡公) 노서(魯舒)의 배위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사육신(死六臣)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5대조로서 형부시랑(刑部侍郞)을 지낸 김중원(金重源)의 따님이기 때문에 신변(身邊)에 위험을 느껴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砥提面) 월산리(月山里) 평장부락(平章部落)에서 낙남(落南)하여 원지(遠地)인 고령군 개진면 직2리 송촌(松村)으로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55세 노승주(魯承柱)
일휘(一諱 : 다른 휘)는 승주(承周)이며 자는 계지(繼之)이다.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낸 노걸(魯杰)과 지례장씨(知禮張氏) 사이에서 세종 17년(1435년) 태어났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훈련원(訓練院) 참군(參軍)을 지냈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추증(追贈)되었다. 성종 21년(1490년) 졸(卒)하였다. 묘(墓)는 고령군(高靈郡) 개진면(開津面) 송촌동(松村洞) 집곡(執谷) 자좌(子坐)에 있다.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慶尙右道)를 온전하게 보존한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金沔)의 외고조부(外高祖父)이다.
② 58세 노삼(魯參)
호는 낙애(洛厓)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희순(希舜)과 학조(學祚)의 따님인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중종 17년(1522년)에 태어났다. 군자감(軍資監) 사직(司直)을 거쳐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개진면(開津面) 송촌동(松村洞)에서 옥산2리 적산(笛山)로 입향(入鄕)하였다. 묘는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대점곡(大店谷) 자좌(子坐)에 있다.
③ 59세 노대용(魯大容)
자는 약부(若夫)이고 호는 도은(道隱)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노중달(魯仲達)과 금위장(禁衛將)을 지낸 윤덕(潤德)의 따님인 단양우씨(丹陽禹氏) 사이에서 명종 22년(1567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다. 학행(學行)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이 치재(痴齋) 허명신(許命申)의 유고(遺稿)에 실려 있다. 인조 7년(1629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산관(山冠)에 있다.
④ 61세 노지도(魯至道)
일휘(一諱) 지희(之熹)요 자는 섭이(燮而)이며 호는 적은(笛隱)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극예(魯克禮)와 성율(聲律)의 따님인 석산김씨(螫山金氏) 사이에서 선조 3년(1570년) 태어났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버지와 함께 왜구에게 붙잡혀 그 칼날에 죽임을 당하려는 순간 아버지를 품에 안듯이 하여 칼날을 막았다. 화가 난 왜구가 마구 칼을 휘둘러 온몸을 난자(亂刺)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네 번이나 사지(四肢)로 막아 사지(四肢)가 절단(切斷)될 때까지 아버지를 보호하니 칼을 든 왜장(倭將)이 공의 효성(孝誠)에 크게 감복하여 칼을 접고 “효자(孝子)”라는 혈서(血書)를 남기고 물러갔다. 후손들이 공의 효성(孝誠)을 기리기 위해 개진면 옥산2리 적산(笛山)에 추원재(追遠齋)를 세웠으며 상재헌(相齋軒) 김여진(金旅振)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묘소는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대점곡(大店谷)에 있다.

(5) 근·현대인물
① 노철규(魯喆圭 : 1931년) 재건중학교 교장, 강화노씨 초대 대종회장.
② 노동택(魯東澤 : 1937년) 토목기술사 농어촌진흥공사 설계처장.
③ 노기근(魯基根 : 1937년) 고령향교 전교. 개진면단위농협조합장.
④ 노종규(魯鍾圭 : 1937년) 담배인삼공사 국장.
⑤ 노영원(魯永元 : 1940년) 강화노씨 한림공파종회 회장.
⑥ 노연수(魯連洙 : 1940년) 강화노씨 한림공파종회 회장.
⑦ 노정규(魯正圭 : 1942년) 산업자원부 국장.
⑧ 노   만(魯 滿 : 1942년) 강화노씨 한림공파 회수회장.
⑨ 노동수(魯東洙 : 1942년) (주)동산섬유 전무이사 현) 국동섬유 대표이사
⑩ 노정부(魯政夫 : 1944년) 극동건설 이사.
⑪ 노인규(魯仁圭 : 1944년) 군수사 서기관.
⑫ 노이수(魯二洙 : 1945년) 경상북도청 서기관.
⑬ 노종근(魯鍾根 : 1949년) 경산시청 사무관.
⑭ 노상율(魯相律 : 1951년) 물리학박사, 홍익대 교수.
⑮ 노순규(魯淳圭 : 1953년) 경영학박사, 기업경영 연구원장.
⑯노태상(魯泰祥 : 1955년) 고령군 개진면장.
⑰ 노태근(魯泰根 : 1956년) 군수사 사무관.
⑱ 노권수(魯權洙 : 1957년) 군수사 서기관.
⑲ 노인자(魯仁子 : 1957년) (주)평화바이오테크 회장.
⑳ 노의철(魯義哲 : 1960년) 전자공학박사, 부경대교수.
(21) 노경록(魯境綠 : 1965년) 대한항공 부장.
(22) 노동훈(魯東熏 : 1969년) 씨티은행 전무.
(23) 노동진(魯東鎭 : 1979년) 경찰청 범죄예방정책과, 경정.

자료제공 : 강화노씨 대종회 총무이사 노광식(魯光植)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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