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03.26 (화)

전의이씨(全義李氏) 장육당(藏六堂)

주간고령 편집부 2019-03-08 (금) 15:47 17일전 18  

 

1. 장육당(藏六堂) 유래(由來)

(1) 장육당(藏六堂)은 전의이씨(全義李氏) 다산면 상곡리(上谷里) 입향조(入鄕祖)로서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한 다포(茶圃) 이지화(李之華)의 아들인 자(字) 여온(汝溫), 호(號) 장육당(藏六堂) 이윤(李玧)이  현종 2년(1671년) 고령군 다산면 상곡5길 7-22 소재에 공부방으로 건립하고 거처하였던 사랑채이다.


(2) 오랜 세월 풍우(風雨)로 퇴락(頹落)한 것을 수차례 중건(重建)하였으며 현재 장육당(藏六堂)은 1968년 중수(重修)하였다. 기문(記文)은 학연거사(學淵居士) 박진구(朴震耉) 소찬(所撰)이며 성순영(成純永)이 찬(撰)한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3) 2006년 2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1호로 지정되었다가 일반 사가(私家)에서 사용하지 못했던 겹처마 구성과 조선 전기 건축수법인 통평고대(통平高臺 : 지붕의 서까래 위에 놓이는 평고대와 착고막이를 하나의 부재로 만든 것), 그리고 특이한 평면 구성인 T자형 평면 등 특징적인 건축기법 등이 인정돼 2017년 5월 1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7호로 등급(종별) 조정되었다.

(4) 장육당(藏六堂)으로 편액(扁額)함은 4족(足)과 머리, 꼬리를 숨기는 거북이처럼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6식(識)을 단속하여 자신을 움츠려 안전(安全)을 추구(追求)하거나 처신(處身)에 만전(萬全)을 기하여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은둔(隱遁)하겠다는 뜻을 비유(譬喩)한 ‘장육귀(藏六龜)’에서 비롯되었다. 

2. 건축형태


(1) 건물의 전체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T’자형으로 12칸의 목조와가(木雕瓦家) 건물이다. 장육당(藏六堂)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는 지형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평탄한 기단(基壇)을 조성하였다.


(2) 전의이씨(全義李氏) 종중 소유이며 ‘T’자형 건물로 유명한 것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1043-1번지 소재 하목정(霞鶩亭)이 있다. 하목정(霞鶩亭)은 임진왜란 때 팔공산에서 의병(義兵將)을 일으켜 서면대장(西面大將)으로 활약한 전공(戰功)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1604년 여생을 보내려고 지은 정자 (亭子)로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능양군(綾陽君) 시절 광해군을 피해 잠시 머문 인연으로 내린 공의 장남 이지영(李之英)에게 내린 어필(御筆) 하목정(霞鶩亭) 현판(懸板)과 인조(仁祖)가 왕위에 등극한 후 왕명(王命)으로 이 집에는 특별히 부연(婦椽)을 달도록 허락한 것이 유명하다.


(3) 자연석 기단 위에 4칸의 방과 측칸으로 이어진 1칸의 누마루가 후면부를 이루며 가로 세로 각각 2칸인 정방형 마루가 전면부를 구성한다.

 
(4) 5량 가구의 팔작지붕에 부연(婦椽)이 있는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고 겹처마의 연목(椽木)을 잡아주는 평고대(平高臺)는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통평고대로 고식(古式)의 수법(手法)을 간직하고 있다. 부연(婦椽)은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를 말하는데 왕궁(王宮)에서나 할 수 있는 건축 기법이다.

 
(5) 사서인(士庶人)의 사가(私家)에는 부연(婦椽)을 달 수 없도록 돼 있으나 이윤(李玧)이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한 이지화(李之華)와 성종의 아홉째 아들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5세손 이각(李覺)의 따님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왕가(王家)의 외손(外孫)이었으므로 부연(婦椽)을 달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6) 장육당(藏六堂)의 오른쪽은 블록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뒤쪽 담장에는 사가(私家)와 연결되던 협문(夾門 : 대문이나 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의 흔적이 보인다. 이외에도 주출입구인 사주문(四柱門)과 입구 왼쪽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관리사(管理舍)가 부설되어 있다.

3. 소유자 및 관리자


전의이씨(全義李氏) 다포공파(茶圃公派) 종중(宗中)으로 되어 있다.


4. 장육당(藏六堂) 이윤(李玧)

공의 자는 여온(汝溫)이다.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한 이지화(李之華)와 성종의 아홉째 아들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의 5세손 각(覺)의 따님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광해군 3년(1611년)에 태어났다. 증조고(曾祖考) 이경두(李慶斗)는 병절교위(秉節校尉) 용양위(龍陽衛) 좌부장(左部長)으로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증직(贈職)되었고 조고(祖考) 이종문(李宗文)은 선조 21년(1588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삼가(三嘉)·비안(比安)·양성(陽城)·군위(軍威) 등 네 고을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공의 집안은 대대로 현달(顯達)한 관직이 끊이지 않았던 권문세족(權門勢族)이었다. 어릴 때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다. 성품(性品)이 온후(溫厚) 순근(醇謹)하고 효우(孝友)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문학(文學)이 순정(醇正)하고 시(詩), 서(書), 행의(行誼)가 널리 알려졌으며 문채(文彩)와 풍류(風流)가 확연하게 빼어났다고 한다. 선공(先公)의 음덕(蔭德)으로 선무랑(宣務郎), 봉훈랑(奉訓郞), 봉직랑(奉直郞), 통덕랑(通德郞) 등 네 낭직(郎職)을 거쳤다. 당시 외조부(外祖父)인 대사헌 이각(李覺)이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내세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키고 서인(庶人)으로 만들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고 사헌부(司憲府) 정언(正言)으로 있었던 아버지 이지화(李之華)가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자 백형 이지영(李之英)과 함께 휴수동귀시(携手同歸詩)를 남기고 낙향(落鄕)하는 등 친가(親家)와 외가(外家)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드러내지 않고 거북같이 6가지를 감추고 있다는 뜻에서 장육당(藏六堂)이라 자호(自號)하며 서재(書齋)를 지어 편액(扁額)을 장육당(藏六堂)이라 이름하고 후학 교육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후 부승지(副承旨)·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지낸 윤리(尹理)와 김수남(金粹南) 등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5. 휴수동귀시(携手同歸詩)


광해군(光海君) 말기에 조정이 극도로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棄官) 고향인 달성군 하빈면 하목리로 돌아오면서(歸鄕) 백형 이지영(李之英)과 손을 붙잡고 이별하면서 함께 읊은 시를 말하며 이러한 사실은 만구선생문집(晩求先生文集) 권지십칠(卷之十七)에 기록되어 있어 아래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1) 수월당(水月堂) 이지영(李之英) 작시(作詩)
探君袖扇蔽狂塵(탐군수선폐광진)
소매 속에 부채 찾아 광진(狂塵)을 가림은
只恐元規汙我人(지공원규오아인)
다만 원규(元規)의 먼지가 우리를 더럽힐까 걱정되어서였지
携出國門歌浩浩(휴출국문가호호)
손잡고 도성문을 나서서 노래 크게 부르며
江湖餘日保殘身(강호여일보잔신)
강호에서 남은 여생 몸이나 보전하세 

(註釋) 원규(元規)
동진(東晉) 때 성제(成帝)의 장인 유량(庾亮)의 자(字)이다. 원규가 서쪽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도 조정의 권력을 농단하였는데, 언젠가 서풍이 불자, 원규를 혐오하던 왕도(王導)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원규의 먼지가 사람을 더럽히는구나.〔元規塵汙人”라고 하였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2) 다포(茶圃) 이지화(李之華) 작시(作詩)
旅洛多年滿帽塵(여락다년만모진)
서울살이 여러해 사모(紗帽)에 먼지만 가득하고
北來風氣正愁人(북래풍기정수인)
북에서 부는 바람 정히 사람을 근심되게 하네
不如歸臥山南屋(불여귀와산남옥)
차라리 돌아가 산 남쪽에 있는 집에 들어 누어
護竹藏花老此身(호죽장화노차신)
대 가꾸고 꽃 심으며 이 한 몸 쉬리라

6. 장육당기(藏六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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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이씨 장육당 상곡리478-2>

나의 벗 자(字) 여온(汝溫) 휘 이윤(李玧)이 정침(正寢 : 제사를 지내거나 일을 보는 몸채의 방)의 오른쪽에 정사(精舍 : 학문을 가르치려고 지은 집)를 짓고 그 편액(扁額)을 장육당(藏六堂)이라 하고 그 기문(記文)을 지을 책임을 나에게 지우니 훌륭한 그 집의 모습을 알고서는 용열(鏞劣)하고 옹졸(壅拙)한 내가 지을 수 있을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여온(汝溫)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우연(偶然)이 아닌듯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 이름을 지은 뜻을 가지고 말하노니 세상 사람들이 그 집에 편액(扁額)을 하는 것을 내가 본 것이 많았으되 대체로 그 마음과 눈으로 완상(琓賞 : 즐겨 구경함)하는 것으로 이름 짓는데 그대만이 ‘장육(藏六)’으로 이름 지었다. 장육(藏六)이라는 것은 거북이니 거북은 완상(玩賞)하는 물건이 아니건만 이를 들어 집에 적용하니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그 취미(趣味)를 달리함인가? 여온(汝溫)의 거처는 나라의 동남(東南)의 한편에 있어 산봉우리가 겹겹이 둘렀고 낙동강(洛東江)이 감돌아 산수(山水)가 분명하고도 아름다운 마을이니 구석진 듯 하나 그래도 한 지방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내가 장육당(藏六堂)에 올라 본 적이 있으니 여기서 그 동쪽을 바라보면 금호강(琴湖江) 물이 흘러 들어오고 달성(達城)이 끌어당기듯 가깝웁고, 그 남쪽은 넓은 들판이 펼쳐있고 비단 같은 맷부리(산봉우리의 가장 높은 꼭대기가 높이 읍(揖 : 인사)하고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안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이 모두 궤석(几席 : 앉을 때 벽에 세우고 몸을 뒤로 기대는 데 쓰는 등받이)앞에 나타나니 이를 인용(引用)하여 편액(扁額)을 삼음이 옳거늘 꼭 거북으로 이름 지으러 함은 무슨 뜻일까? 내가 생각건대 거북은 겉껍질을 가진 동물 중에 으뜸이라. 낙수(洛水)에서 나와 성인(聖人)의 상서(祥瑞)로움을 나타내며, 묘당(廟堂 : 조정)에 들어가서는 나라의 보배가 되었으니, 그 영험(靈驗 : 사람의 기원대로 되는 신기한 징험)스러움이 본디 환하게 나타나고 신비하고 이상한 자취가 몸 안에 쌓였으니 바야흐로 그 고요함을 간직한 까닭이다. 그 목은 움츠려 숨겨 머리를 감추고, 그 다리는 거두어 없는 듯이 행하여 발을 감추고 거두고 감싸서 흔들지도 아니하고 끌지도 아니하니 꼬리를 감추는 방법이었다. 귀는 듣지도 아니하고 눈은 보지 아니하여도 마음은 고요하여 오로지 위험한 것을 넘지 아니하고 위태로운 것을 밟지 아니하여서 몸은 스스로 안온(安穩 : 조용하고 편안함)하여 어여쁘게 보일려고도 하지 아니하여 욕(辱)을 불러들이지 아니하고, 외모(外貌)를 꾸며서 화(禍)를 사지도 아니하니 이는 진실로 만물 중에 가장 기이(奇異)한 것이다, 이에 여온(汝溫)의 집의 이름을 거북에서 취한 까닭이 또한 이런 뜻이었겠구나 하였거늘 이에 여온(汝溫)이 기뻐하며 나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하니 내 또 한 그를 위로(慰勞)하여 말하노니, 내가 여온(汝溫)에 대하여 숭상(崇尙)하고 감동(感動)하는 바 있거늘 무엇이냐 하면은 여온(汝溫)은 벼슬하는 가문(家門)에서 태어나고 학문(學問)과 문장(文章) 속에서 자라 자연(自然)을 노래하는 재주와 하늘과 같은 높은 뜻을 머릿속에 간직하였으나, 재주가 운명(運命)의 미움을 당해 통달(通達)하지 못하여 일과 마음이 서로 이긋났음이다. 만년(晩年)에 이르러 공(功)을 남에게 돌리고, 늙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거북의 형상(形象)으로써 자신에 비유하여, 임천(林泉 :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기 알맞은 곳)에 머리 숙이고 구원(丘園 : 은거하는 땅을 말함)에 발을 붙이면서 문(門)위에 장육당(藏六堂)이라는 현판(懸板)을 걸어놓고 눈을 항상 거기에 두고 영원히 잊지 아니함을 맹세하였으니, 여온(汝溫)의 뜻은 숭상(崇尙)할 만하고 그 정(情)은 슬퍼할 만하다. 내가 느낀 것이 이렇다 하니, 여온(汝溫)이 초연(超然)히 용모(容貌)를 단정(端正)히 하고 그대의 말 그대로 이다 하거늘, 내 천천히 물어 말 하노니 그대는 저 자벌레를 보지 못했느냐? 자벌레가 움추릴 때는 반드시 펼치고자 함이니 거북 또한 그 감춤에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비록 눈을 뜨고 돌아보면야 스스로 세차게 일어나는 때가 있다 할지라도 움츠리면 반드시 펼치고 감추면 꼭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치의 떳떳함이다. 그러므로 그 감춤을 당하여서는 할 바가 있지 아니한 뜻 하나 그 움직임에 미쳐서는 앞서 줄어들고 움추린 것이 머리를 내밀고 앞서 거두어 움츠리다 없어진 것이 다시 나오고 앞서 거두어 감춘 것이 이미 흔들고 끌어서 크고도 넓음이 큰 물결의 장대(長大)함을 능가(凌駕)하고, 큰 산골짜기(大壑)의 깊음을 쫓아 순간에 천리(千里)를 달려 오직 뜻한 대로 가니 어찌 움츠려야 펴지고 숨겨야 나타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여온(汝溫)은 참으로 초야(草野)에서 늙어 죽을 사람이 아니라 그대가 비록 숨고자 하나 세상이 그대를 버리지 아니 할 것이니 어찌 다른 날에 눈썹을 펴고 기운을 토(吐)하면서 다리를 펴고 서울의 거리를 달릴지 어찌 알겠는가? 영채(靈蔡 : 신령한 거북)가 푸른 물로 되돌아가듯이 스스로 그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내 이런 까닭으로 ‘굽히면 반드시 펴지고, 숨으면 반드시 나타나나니, 이는 이치의 당연함이라. 생각컨대 우리의 여온(汝溫)은 힘쓸지어다’ 라고 말하니 여온(汝溫)은 빙그레 웃으면서 벽에 기록할 글을 청하거늘 정말로 이렇게 써서 여온(汝溫)의 청을 들어 주노라.

신해(辛亥) 현종 12년 1671년 8월 상한(上澣) 학연거사(學淵居士) 박진구(朴震耉) 기록하다. 

(註釋) 자벌레(尺蠖 : 척확)
자나방과 곤충의 유충으로 배다리가 퇴화(退化)되어 운동할 때 자로 재는 것처럼 움직이는 벌레를 말한다.

 

 

 

자료제공 : 성균관유도회 총본부 부회장 이국로(李國魯),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崔鍾東)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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