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03.26 (화)

3·1독립운동 100주년 특집

주간고령 편집부 2019-02-26 (화) 15:40 27일전 46  


옛, 덕곡면사무소

고령지역 ‘3·1독립만세(獨立萬歲) 시위운동(示威運動)’ 고찰(考察) 

 

 

최초 독립만세 발상지, 덕곡면 가륜리(옛 덕곡면사무소 앞)

​1. 서언

(1) 1918년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각 민족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主唱)하고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도쿄(東京)의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한국 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명의로 2·8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한 것이 범민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의 기폭제(起爆劑)가 되었다.

(2) 따라서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특별시 중구 인사동에 있었던 요릿집인 명월관(明月館)의 별관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민족적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인 3·1운동을 전개하였다.

(3)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무서운 기세(氣勢)로 전국적으로 퍼져갔던 3·1 만세운동(萬歲運動)은 같은 해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기독교인‧장꾼‧계성학교(啓聖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등 1,0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연창(連唱)하며 대구경찰서를 거쳐 동성로(東城路)로 진입하다가 일본군 보병 8연대에 의하여 구타(毆打)‧폭력(暴力) 등 가혹한 탄압으로 해산당하였던 것이 영남지역 최초의 3·1운동인 ‘서문시장(西門市場) 3·1 운동’이었다.

(4) 그후 경북지역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의 효시(嚆矢)가 되었던 ‘포항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은 3월 11일 영일군 포항면 즉 현재 포항시에서 일어났으며 3월 12일에는 의성군 비안면과 선산군 인동면에서 일어났다. 폭발적으로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이 확산된 것은 3월 16일 이후이며 그달 27일까지 절정기에 달하다가 4월 26일과 5월 7일에 한 차례씩 일어나면서 종말(終末)을 고했다. 

(5) 고령지역의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은 경북 타지역에 비해 비교적 늦은 3월말에서 4월 초순에 집중되었다. 3월 29일 고령지역 최초로 ‘덕곡면 가륜동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뒤이어 4월 6일 우곡면 도진동 제1차 독립만세 시위운동, 4월 8일 우곡면 도진동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 및 우곡면 대곡동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6) 그동안 일부 문중 위주로 경도(傾倒)되었던 고령지역의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객관적인 문헌과 자료에 의거 전개 및 경과, 주도인물의 가계(家系), 수형량(受刑量), 서훈(敍勳) 등을 올바르게 밝혀 고령지역의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항일운동(抗日運動)의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하고자 한다.

2. 고령지역 3·1 독립만세 시위운동

(1) 쌍림면 매촌동(梅村洞) 독립만세 시위운동
① 전개 및 경과
 고령군 쌍림면 매촌동에 거주하면서 기독교 강사(講師)로 활동하였던 최경현(崔卿鉉)은 대구(大邱)·합천(陜川)·초계(草溪) 등지에서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는데도 고령지역의 양반유생(兩班儒生)들이 독립에 대한 의지(意志)가 없음을 개탄(慨歎)하고 1919년 3월 24일 거동서당(居洞書堂) 오성렬(吳聖烈)의 집에서 서병직(徐丙稷)을 만나, 날짜를 정하여 군민궐기대회(郡民蹶起大會)를 열기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3월 27일에는 이준이(李俊伊)의 집에서 최홍석(崔洪錫)에게, 3월 28일에는 쌍림면 신촌리에 사는 전하성(全夏誠)에게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자고 동지들을 규합(糾合)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도중에 탄로되어 검거됨으로써 쌍림면 매촌동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② 주도인물(主導人物) 가계(家系), 수형량(受刑量), 서훈(敍勳)

▣ 최경현(崔卿鉉)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학여(鶴汝)이다. 아버지 철곤(哲坤)과 두만(斗萬)의 딸인 월성최씨(月城崔氏) 사이에서 1864년 8월 3일 고령군 쌍림면 매촌동 168번지에서 태어났다. 공은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1년을 받았다. 상고하였으나 5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1월 27일 향년 64세로 졸(卒)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2) 덕곡면 가륜동(加倫洞) 독립만세 시위운동
① 전개 및 경과
고령군 덕곡면 원송동(元松洞)에 살고 있었던 배기석(裵基奭)은 합천에서는 1919년 3월 18일 삼가(三嘉) 장날에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시작되었고 3월 19일 합천읍에 이어 관내 각면으로 확산되었으며 성주군에서는 1919년 3월 27일 선남면 소학동과 가천면 동원동에서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이 펼쳐지는 등 인근 지역에서는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유독 고령지역은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없어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있던 중 3월 29일 뽕나무를 심는 부역(賦役)을 끝마치자 약 20여명의 인부가 모인 고령군(高靈郡) 덕곡면(德谷面) 가륜1리(伽倫一里) 속칭 ‘새밤’ 소재 덕곡면사무소 구내에서 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치자, 인부들도 이에 동조(同調)하여 독립만세를 함께 불렀다. 그러나 인근 가륜2리에 소재하였던 덕곡면 주재소(駐在所)의 일본 경찰에 의해 시위 군중은 해산당하고 배기석은 그 자리에서 체포 및 구금되었다.

② 주도인물(主導人物) 가계(家系), 수형량(受刑量), 서훈(敍勳)

▣ 배기석(裵基奭)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자는 무약(武若)이며 족보명은 배석휴(裵奭烋)이다. 아버지 배학구(裵鶴九)와 성산이씨 어머니 사이에서 고종 24년(1887년) 4월 14일 고령군 덕곡면 원송동에서 태어나 숙부인 배학천(裵鶴天)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일제(日帝)는 공에게 덕곡면 가륜동(加倫洞)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를 적용하여 1919년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獄苦)를 치루었다. 1956년 3월 5일 별세하여 고령군 덕곡면 원송동에 안장(安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 8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追敍)받았고 ‘항일투사유공자훈장(抗日鬪士有功者勳章)’을 수여받았다.

(3) 우곡면 도진동(桃津洞) 제1차 독립만세 시위운동
① 전개 및 경과
1919년 4월 6일 우곡면 야정동(野亭洞)의 박재필(朴在弼)은 선조의 묘역에 사초(莎草 : 떼입히기)를 하기 위해 모인 고령박씨(高靈朴氏) 문중 사람들과 우곡면 도진동(桃津洞) 노경익(盧慶益)의 고용인(雇傭人) 박영화(朴英華)와 박도천의 고용인(雇傭人) 박차천(朴且千) 등과 비밀리에 논의한 끝에 만세시위(萬歲示威)를 벌이기로 약속하고 농민 30여명을 규합하여 그날 저녁 강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국내 정세(情勢)와 만세운동(萬歲運動)의 당위성(當爲性)을 역설(力說)하였다. 사람들은 박재필의 독립만세 선창(先唱)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후 목재나팔을 불면서 동네를 일주(一周)하고 계속 만세를 부르면서 우곡면사무소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는데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100여 명이 넘었다. 이들은 박재필이 나누어준 태극기를 흔들며 밤 11시까지 시위를 계속하다가 면장의 만류로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출동한 고령경찰서의 경찰에 의해 박재필(朴在弼)을 비롯한 박영화(朴英華)·박차천(朴且千) 등은 체포 및 구금되었다.

② 주도인물(主導人物), 수형량(受刑量), 서훈(敍勳)

▣ 박재필(朴在弼)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원경(元卿)이며 호는 소여(少旅)이다. 공의 호(號)를 소여(少旅)라 함은 평생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니는 나그네였다는데서 연유 (緣由)한 것이라 한다. 고종 17년(1880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한 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1910년 중국으로 건너가 구국투쟁(救國鬪爭)을 벌였 던 애국지사(愛國志士) 기렬(璣烈)과 명섭(明燮)의 딸인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 에서 1884년 7월 12일 고령군 우곡면 야정리 930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제(日帝)는 공에게 우곡면 도진동 제1차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를 적용하여 1919년 6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여 대구형무소에서 옥고 를 치루었다. 1957년 6월 2일 졸(卒) 하였으며 묘는 고령군 우곡면 야정동 아곡촌 (阿谷村) 뒷편 건좌(乾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4) 우곡면 도진동(桃津洞)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
① 전개 및 경과
1919년 4월 6일 우곡면 도진동(桃津洞) 제1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이어 1919년 4월 8일에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있었는데 이를 ‘우곡면 도진동(桃津洞)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라 한다. 1919년 4월 8일 도진동에 사는 박기태(朴基泰)의 집에서 혼사(婚事)가 있었는데 고령경찰서에서 파견된 4명의 경찰이 나와 혼사(婚事)에 참석한 사람들을 강제로 우곡면사무소에 모아놓고 일제의 우월성(優越性)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정당성(正當性)을 역설(力說)하고 독립운동(獨立運動)을 경고(警告)하는 시국강연(時局講演)이 있었는데 참석자들은 모두 강연을 들으면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할 수 밖에 없었다. 도진동에 사는 박채환(朴採煥)은 시국강연(時局講演)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십 명의 군중들에게 민족독립(民族獨立)의 당위성(當爲性)을 역설하고 만세시위를 촉구한 후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선창(先唱)하니 군중 모두가 호응하였다. 이때 박채환(朴採煥)은 출동한 경찰에 의해 검거(檢擧)되고 군중들도 강제 해산을 당하였다. 

② 주도인물(主導人物), 수형량(受刑量), 서훈(敍勳)

▣ 박채환(朴採煥)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경삼(敬三)이다. 아버지 내순(來淳)과 지묵(志)의 딸인 합천이씨(陜川李氏)사이에서 고종 21년(1884년) 고령군 우곡면 도진동 32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제(日帝)는 공에게 우곡면 도진동 제2차 만세시위운동 을 주도한 혐의를 적용하여 1919년 4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언도하여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5) 우곡면 대곡동(大谷洞) 독립만세 시위운동
① 전개 및 경과
도진동 2차 만세시위운동 강제 해산에 격분(激憤)한 도진동 거주 박기로(朴基魯)는 우곡면 대곡동(大谷洞)으로 달려와 1919년 4월 8일 밤 김성원 집앞 노상에서 그곳에 사는 한이군(韓二君), 한용발(韓用發), 도말용(都末用), 박용학(朴龍鶴), 한광룡(韓光龍) 등 수 명의 청년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마을 청년들에게 도진동 상황을 알리며 만세운동을 권고하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선창(先唱)하니 군중 모두가 호응하였다. 이들은 다시 밤 11시 나팔을 불어 모인 동민 50여 명과 함께 밤늦도록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 운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주재소에 이같은 사실이 알려져 출동한 십여 명의 일본 경찰에 의해 군중은 해산되고 박기로(朴基魯) 등 6명은 체포 및 구금되었다.

② 주도인물(主導人物), 수형량(受刑量), 서훈(敍勳)
 
▣ 박기로(朴基魯)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성흥(聖興)이다. 아버지 이찬(燦)과 진우(鎭佑)의 딸인 현풍곽씨(玄風郭氏) 사이에서 1872년 태어났다. 고종 21년(1884년) 고령군 우곡면 도진동 8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제(日帝)는 공에게 우곡면 대곡동(大谷洞) 독립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한 혐의를 적용하여 1919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保 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하여 옥고를 치루었다. 1941년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뒷편 간좌원(艮坐原)이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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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덕곡주재소(파출소)

3. 결어(結語)

(1) 고령지역의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은 1919년 3월 말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 (未遂)에 그친 쌍림면 매촌동(梅村洞)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기점(起點)으로 5회에 걸쳐 4월 초순까지 집중되었으며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으며, 반일의식(反日意識)과 독립의지(獨立意志)가 반영된 독립운동이었다.

(2) 최초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배기석(裵基奭)의 주도로 덕곡면 사무소에서 일어난 ‘덕곡면 가륜동 독립만세 시위운동’이며 가장 활발하게 펼쳐진 독립 만세 시위운동은 박재필(朴在弼), 박채환(朴採煥), 박기로(朴基魯) 등 고령박씨 문중인사들이 주도하였고 우곡면 도진리를 중심으로 펼쳐진 시위운동이었다.

(3) 1920년 박은식(朴殷植)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의하면 “고령은 3·1운동에서 대구부(大邱府)를 제외하면 주변지역에서 그 기세 (氣勢)를 가장 크게 떨친 곳이었다”라고 기록하여 고령지역 3·1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4) 또한 1919년 4월 137명의 유림대표(儒林代表)가 장문(長文)의 ‘한국독립청원서(韓國獨立請願書)’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파리장서운동’에 고령출신 서명자(署名者)가 7명으로 경북지역내에서 성주, 달성, 봉화 다음으로 서명 자가 많다는 사실은 고령유림의 민족운동 참여 성격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

(5) 따라서 고령지역 최초로 3·1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인 덕곡면 가륜1리 덕곡면사무소 옛터에 ‘3·1독립만세운동기념탑(三一獨立運動紀念塔)’을 세워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기리고 그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는 관민(官民)의 노력이 조기에 결실을 맺기를 기원한다. 참고적으로 인근 합천에는 일해공원(日海工園)안에 합천 3·1독립운동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가 주관하여 2001년에 ‘합천3·1독립운동기념탑(陜川三一獨立運動紀念塔)’을 건립하였다.


* 고령지역 ‘최초 3·1독립만세 시위운동 발상지’인 덕곡면사무소 옛터와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殘酷)한 고문의 현장’인 덕곡면 주재소를 안내해 준 덕곡면 노인회 최중강 회장께 고마움을 전한다.

- 집필 향토사학자 겸 시민기자 이동훈(李東勳),
- 정리 최종동 편집국장

<정정보도>
본지 제67호(2019. 2. 25일자) 8면 고령지역 ‘3·1독립만세(獨立萬歲) 시위운동(示威運動)’ 고찰(考察) 기사 중 아래 사람의 가계 및 출생 기록을 정정합니다. 
1. 박채환(朴採煥)
내순(來淳)과 응진(應瑨)의 딸인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
2. 박기로(朴基魯)
내순(來淳)과 응진(應瑨)의 딸인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 이찬(燦)과 진우(鎭佑)의 딸인 현풍곽씨(玄風郭氏) 사이에서 1872년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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