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03.26 (화)

기획연재-정자와 재실의 유래를 찾아서

주간고령 편집부 2019-02-12 (화) 23:53 1개월전 90  


전의이씨(全義李氏) 반학정(伴鶴亭)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반학정(伴鶴亭) 유래(由來)
(1) 반학정(伴鶴亭)은 숙종 28년(1702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성균생원(成均生員) 복후(復厚)가 종전 선향지(先鄕地)인 다산면 상곡리(上谷里)를 떠나 약 260년전 다산면 월성리 차남(車南) 즉 수리니미 마을로 입향(入鄕)하여 낙동강가의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산 124번지내에 창건(創建)하였다.
(2) 성균생원(成均生員) 복후(復厚)가 노다강상(老多江上)에 정자를 지어 자호(自號)인 반학정(伴鶴亭)으로 정호(亭號)를 삼고 이곳에서 강산풍월(江山風月)을 벗 삼아 탄금(彈琴)과 독서(讀書)로 우아(優雅)한 풍류(風流)를 즐겼다고 한다.
(3) 그러나 반학정(伴鶴亭)은 오랜 세월에 풍우(風雨)를 견디지 못하여 후손들이 수차례 중건(重建)하였으나 퇴락(頹落)하는 지경에 이르니 2008년 후손들이 정재(淨財)를 모아 생전에 당대의 명사(名士)와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자취가 아련히 남아 있는 차남(車南)마을 어귀 다산면 월성리 200-2번지에 정자를 다시 세웠다.

2. 건축형태
(1) 반학정(伴鶴亭)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측 1칸과 우측 1칸은 온돌방을 만들고 그 사이 3칸은 대청을 놓았다.
(2) 경내(境內)에는 ‘성균생원(成均生員) 반학정(伴鶴亭) 전의이공(全義李公) 휘(諱) 복후(復厚)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3) 반학정(伴鶴亭) 입구 정문에는 인경문(仁敬門)의 현판이, 반학정(伴鶴亭) 건물내에는 경모재(景慕齋)와 수인당(修仁堂)의 현판이 걸려 있다.

3. 성균생원(成均生員) 이복후(李復厚)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형만(亨萬)이고 호는 반학정(伴鶴亭)이다. 생원(生員)을 지낸 익혐(益)과 사인(士人) 후(煦)의 따님인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숙종 14년(1688년) 다산면 상곡리 구제(舊第 : 옛집)에서 태어났다. 상곡(上谷)에서 영조 26년(1750년)경 처음으로 집안에 데리고 있는 식구(食口)들을 거느리고 차남(車南)으로 이거(移居)하여 전의이씨(全義李氏) 차남입향조(車南入鄕祖)가 되었다. 그 후손들은 이곳에서 260여 년간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대대로 세거(世居)하고 있다. 경종 3년(1723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후 문음(門蔭)으로 통덕랑(通德郞)의 자품(資品)을 받았다. 공의 집안은 고(考) 익혐(益)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장남 곤후(坤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 입격하고, 차남인 공은 생원시에, 3남인 관후(觀厚)는 문과(文科)에, 4남 항후(恒厚)는 무과(武科)에 급제하는 등 ‘오부자(五父子) 등과(登科)’로 세간(世間)의 칭예(稱譽)를 받았던 당대의 명문가(名門家)이었다. 문사(文詞)가 훌륭하고 특히 사서(四書)의 문의(文義)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 있다. 특히 영조 50년(1774년) 성주군 대가면 소재에 건립되었던 ‘도천서원(道川書院) 강당(講堂)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다는 기록이 등암(藤庵) 배상룡(裵尙龍) 선생의 문집인 등암집(藤庵集)에 수록(收錄)되어 전한다.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백대의 사표(師表)가 되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추모(追慕), 제향(祭享)하는 전당(殿堂)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인 회연서원(檜淵書院)의 동주(洞主)에 세 번이나 천임(薦任)되었던 사실은 공이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았으며 경학(經學)과 언행(言行)이 당세(當世) 사림의 전범(典範)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노다강변(老多江邊)에 정사(精舍)를 지어 그 이름을 자호(自號)를 따라 반학정(伴鶴亭)이라 하고 금서(琴書)와 시주(詩酒)로 만년(晩年)을 보냈다가 영조 1775년 향년 88세로 기세(棄世)하였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산36번지 갈티골 신좌(辛坐)이다. 초취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덕승(德升)의 따님인 월성손씨(月城孫氏)이고 재취(再娶)는 생원(生員) 준(準)의 따님인 여산송씨(礪山宋氏)이다. 삼취(三娶)는 사인(士人) 동형(東馨)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註釋) 동주(洞主)
서원의 관리와 운영 책임을 맡아보던 사람. 원장(院長)이라고도 한다.


4. 전의이씨(全義李氏) 반학정(伴鶴亭) 중건기(重建記)
이 정각(亭閣)은 차남입향조(車南入鄕祖)이신 성균생원공(成均生員公) 휘(諱) 복후(復厚)께서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 년 전 노다강(老多江) 위 현(現)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산 124번지내에 처음 창건(創建)하였으며 이곳은 그 지세(地勢)가 가야(伽倻)와 의봉(儀鳳)의 정맥(靜脈)이 겹겹이 이어져 뒤로 산봉우리가 병풍(屛風)처럼 둘러졌고 앞으로는 바로 뜰아래 절벽(絶壁)밑으로 낙동강(洛東江) 푸른물이 굽이쳐 흐르며 또한 고개를 들면 옥포(玉浦), 논공(論工) 넓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있고 그 너머 우뚝 솟은 비슬산(琵瑟山) 영봉(靈峰)이며 바로 앞 도미산이 읍(揖)하듯 이마에 마주하니 그 수려(秀麗)한 풍광(風光)으로 옛부터 널리 알려진 이름있는 터였다. 여기에 공(公)께서 일찍 정자(亭子)를 지어 자호(自號)인 반학정(伴鶴亭)으로 정호(亭號)를 삼고 강산풍월(江山風月)을 벗 삼아 탄금(彈琴)과 독서(讀書)로 우아(優雅)한 풍류(風流)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자손들이 불민(不敏)하고 정성(精誠)이 부족하여 정자(亭子)는 오랜 세월에 풍우(風雨)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취만을 희미하게 남겨 놓고 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地境)에 이르렀다. 그 후 1960년대초 당시 덕산공(德山公)이 앞장서고 여러 후손들이 힘을 보태기로 하여 1차 정(亭)의 중건(重建)을 도모하였으나 사세(事勢)가 이에 따르지 못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후 대(代)를 이어 오랜 후손들의 한결같은 숙원(宿願)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공의 적덕여음(積德餘蔭)으로 후손들의 문호(門戶)가 날로 늘어나고 커져가는 문중(門中)의 형세(形勢) 또한 지난날 어른들이 이루지 못한 염원(念願)을 끝내 미룰 수만 없다는 공감대(共感帶)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온 종원(宗員)으로 이어져 드디어 2007년 1월 5일 종중정기총회(宗中定期總會)에서 정(亭)의 중건(重建)을 결의하고 바로 추진위원회(推進委員會)를 결성하여 사업계획(事業計劃)과 추진일정(推進日程)은 위원회(委員會)에 전권(全權)을 위임(委任)하기로 하였으며 건축할 용지(用地)는 처음 세웠던 자리에서 공이 생전(生前)에 터잡아 기거(起居)하시고 학문을 탁마(琢磨)하시던 유서(由緖)깊은 차남(車南)마을 어귀에 수년전부터 미리 확보하여둔 못 터로 옮겨 규모와 형태는 오창(梧倉) 충효재(忠孝齋)를 본보기로 목조와가(木造瓦家) 5칸 팔작(八作)지붕에 부연(婦椽)을 달아 건축하되 웅장하고 화려함 보다 아담(雅澹)하고 소박(素朴)함을 담아 실용적(實用的)이면서도 전통적 고건축미(古建築美)를 갖추도록 하여 자랑스럽게 후대(後代)에 물려 줄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이 되도록 기획(企劃)하였다. 자금계획은 소요예산을 약 4억원으로 책정하여 지난날 어른분들이 푼푼이 모아 아끼고 증식(增殖)하여 마련한 종토(宗土) 일부를 처분하여 2억정도를 충당하고 나머지는 종원(宗員)들의 헌성(獻誠)에 의존하기로 한 바 이에 전 종원들이 너도나도 이 위선(爲先)의 대열(隊列)에 빠질새라 열성적으로 호응동참(呼應同參)하여 불과 수개월만에 당초 목표하였던 금액을 초과 달성하는 큰 성과를 이루어 냈으며 특히 추진위(推進委) 결성(結成) 당일 첫 번째로 금일천만원을 헌성록(獻誠錄)에 올린 종두(鍾斗)와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기모 아주머니께서 그간 수중(手中)에 간직해온 일천만원의 거금(巨金) 전액을 쾌(快)히 이 사업에 헌성(獻誠)한 일들은 이 정(亭)과 함께 오래토록 그 이름이 남을 것이다. 그동안 이 정(亭)을 착공(着工)하여 준공(竣工)에 이르기까지 건물의 설계(設計)와 감리(監理)를 담당한 이건건축사무소 박대규 건축사, 목조부분 전체의 시공(施工)을 도맡은 한국고건축 최경탁 도편수, 목재를 조달한 대경제제소 최대부 사장, 석물부분공사의 합동석물 탁희열 사장, 지붕공사를 맡은 대동기와 김용제 대표와 토목, 담장, 전기 등 부대공사를 맡아 시공한 모든 분들이 정성과 성의를 다해 마무리를 잘해준 데 대하여 감사하며 또한 반학정(伴鶴亭)과 인경문(仁敬門) 등 편액(扁額)을 정성껏 써 달아주신 조양제(趙良濟) 선생께도 아울러 고마움을 표(表)한다. 이밖에 다포공파(茶圃公派) 종중(宗中)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7천만원의 큰 지원(支援)이 있었으며 각종법령(各種法令)의 규제조항(規制條項)으로 개발과 이용이 불가능한 용지를 이태근(李泰根) 고령군수(高靈郡守)의 특단(特段)의 행정적 배려에 의해 농업기반시설(溜地 : 유지)의 용도폐지(用度廢止)가 어려운 가운데 이루어지고 이를 계기로 개발제한구역(開發制限區域)에서 해제되는 기회마져 얻게 되어 마침내 건축용지(建築用地)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바 이 사실 또한 오래토록 기억해 둘 일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故) 종학(鍾鶴), 지로(智魯), 종건(鍾建) 등 역대 종중회장(宗中會長)과 경로(景魯), 종복(鍾福) 부위원장(副委員長)을 비롯한 추진위원(推進委員) 여러분 또한 일문회(一門會)의 학세(鶴世), 학로(學魯) 등 전현회장(前現會長)을 비롯한 전회원(全會員), 이 모든 분들의 노력과 지원의 힘이 컸으며 특히 종두(鍾斗) 총무(總務)와 감역(監役)을 맡은 문세(文世)의 그간의 노고에 찬사(讚辭)를 보내며 주위의 조경(造景)을 아담하게 할 수 있도록 주선(周旋)한 종구(鍾九) 이장(里長)의 공로(功勞) 또한 크게 치하(致賀)하는 바이다. 오늘 이 반학정(伴鶴亭)은 이렇듯 내외(內外)의 수많은 분들의 도움과 관계자들의 열성적인 노력 및 온 후손들의 정성이 한데 어울려 이룩된 결정체(結晶體)임을 특히 밝혀둔다. 아무쪼록 이 정(亭)을 앞으로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재각(齋閣)으로 종원간(宗員間)의 화목(和睦)을 도모(圖謨)하는 종청(宗廳)으로 후진들을 계도(啓導)하는 학당(學堂)으로 두루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잘 보존(保存)하고 관리(管理)하여 이 정(亭)과 함께 차남문중(車南門中)의 영원무궁한 번영(繁榮)을 기원(祈願)하면서 위와 같이 전말(顚末)을 기술(記述)하다.
세무자(歲戊子) 서기 2008년 5월 일
반학정중건추진위원회 위원장(伴鶴亭重建推進委員會 委員長)
 이국로(李國魯) 근지(謹識)
함안(咸安) 조양제(趙良濟) 근서병각(謹書幷刻)

5. 성균생원(成均生員) 반학정(伴鶴亭) 전의이공(全義李公) 휘(諱) 복후(復厚) 유허비(遺墟碑) 비문(碑文)
이곳 차남(車南)은 성균생원공(成均生員公)이 본면(本面) 상곡(上谷)으로부터 이곳으로 솔권(率眷 : 집안 식구를 거느리고 가거나 옴)하여 이거정착(移居定着)한 후 그 후손들이 이백수십년을 면면(綿綿)히 이어오며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지성(至誠)으로 가꾸어온 유서(由緖) 깊은 마을이다. 입향조(入鄕祖)의 휘(諱)는 복후(復厚)이고 자는 형만(亨萬) 호는 반학정(伴鶴亭)이며 성관(姓貫)은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니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는데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史)에 올라 전산후(全山侯)에 봉작(封爵)된 시호(諡號) 성절(聖節)인 휘(諱) 도(棹)가 그 시조(始祖)이다. 이후로 높은 벼슬이 대대로 끊어지지 아니하였고 7세에 이르러 휘(諱) 천(仟) 호(號) 동암수공(東巖叟公)이 중서시중(中書 侍中)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수군(水軍)을 이끌고 몽고(蒙古)에 항전하여 전공(戰功)이 컸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며 동암수공(東巖叟公)이 아들 삼형제를 두니 그 계자(季子)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낸 휘(諱) 자화(子華)가 첫 분파(分派)된 삼파중(三派中) 계파(季派)의 파조(派祖)이다. 그 아들이 전법총랑(典法摠郎)을 지낸 휘(諱) 득영(得榮)이며 장자(長子)가 조선조에 처음 들어 공주목사(公州牧使)와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낸 휘(諱) 구직(丘直)이며 아들 사형제 중 계자(季子)가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낸 휘(諱) 문간(文幹)이며 그 아들 휘(諱) 계손(季孫)은 세종조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내고 그 뒤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삼전(三傳)하여 예산현감(禮山縣監)을 지낸 휘(諱) 필(佖)이 처음 서울로부터 대구(大邱) 하빈(河濱)으로 이거정착(移居定着)하였으며 그 아들 휘(諱) 경두(慶斗)는 임란(壬亂) 때 곽망우당(郭忘憂堂)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의병활동(義兵活動)을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아들 휘(諱) 종문(宗文) 호(號) 낙포(洛浦) 역시 임란시(壬亂時)에 생원(生員)으로 팔공산에서 창의(倡義)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비안(比安), 군위(軍威) 등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냈으며 낙포공(洛浦公)의 중자(仲子)인 휘(諱) 호(號) 다포(茶圃)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내외 청요(淸要)의 직(職)을 두루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으며 하산(霞山)으로부터 다산(茶山) 상곡(上谷)으로 이거(移居)하신 상곡입향조(上谷入鄕祖)이니 바로 공의 고조고(高祖考)이다. 증조(曾祖)는 휘 윤(玧) 호 장육당(藏六堂)이며 시(詩), 서(書), 행의(行誼)가 널리 알려졌으며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정진(精進)하여 많은 인재들을 성취(成就)시켰다. 조고(祖考)는 휘 시상(時相)이며 문음(門蔭)으로 통덕랑자(通德郞資)를 받았으며 고(考)는 휘 익혐(益)으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그 네 아들이 대소과제(大小科第)에 오르니 오부자(五父子) 등과(登科)라는 세간(世間)의 칭예(稱譽)가 있었다. 비(妣)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사인(士人) 후(煦)의 여(女)이며 현령(縣令) 이량(以亮)의 손녀(孫女)이다. 공은 숙종 무진(戊辰) 1688년에 상곡(上谷)에서 태어나 경종 계묘(癸卯) 1723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랐으며 문사(文詞)가 훌륭하고 특히 사서(四書)의 문의(文義)에 밝았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며 일찍부터 뜻을 세속(世俗)에 두지 않고 몸소 행검(行檢)을 삼가 성현(聖賢)의 도(道)를 연구하느 데만 오로지 하였으며 이곳 차남(車南)에 새로 터를 잡아 자손만대(子孫萬代) 번영(繁榮)의 기틀을 마련하고 오직 효행(孝行)과 우애(友愛)로 가도(家道)를 세우는데 힘썼다. 한편 사액서원(賜額書院) 회연(會淵)의 동주(洞主)로 세 번이나 천임(薦任)되는 등 당시 사림(士林)들의 신망(信望)하는 바가 두터웠다 한다. 만년(晩年)에는 노다강상(老多江上)에 정자(亭子)를 세워 자호(自號)인 반학정(伴鶴亭)으로 정호(亭號)로 삼고 강산풍월(江山風月)을 벗삼아 탄금(彈琴)과 독서(讀書)로 스스로 우아(優雅)한 풍류(風流)를 즐겼다. 이렇듯 아름다운 덕업(德業)과 깨끗한 행적(行績)을 남기고 영조 을미(乙未) 1775년에 향수(享壽) 88세로 고종(古終)하니 본면(本面) 벌지리 속명(俗名) 갈티골 신좌(辛坐)로 장례(葬禮)를 모셨다. 이번에 오래도록 염원(念願)하던 반학정(伴鶴亭)을 처음 세웠던 곳에서 위치를 옮겨 공이 자손의 번영을 위하여 필생(畢生)의 과업(課業)을 이룩한 이곳 차남동리(車南洞里) 어귀에 후손들의 정성을 한데모아 새로 중건(重建)하고 그 경내(境內)에 공(公)의 유덕(遺德)을 후세에 오래도록 기리고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기로 하여 비(碑)에 새길 글을 부족한 이 사람에게 맡기니 이를 거스리지 못하고 삼가 여러 문헌(文獻)들을 참고하여 위와 같이 기술(記述)하고 이에 명(銘)을 이으니
태백(太白)의 푸른 기상(氣像) 수레남에 드리우니
학정공(鶴亭公)의 어진 공덕(功德) 그 가운데 밝았도다.
낙강(洛江)의 맑은 물이 쉼없이 흐르듯이
대(代)를 이어 영세(永世)토록 유업(遺業)을 전승(傳承)하리

세무자(歲戊子) 서기 2008년 3월 일
6대손 국로(國魯) 근지(謹識)
진성(眞城) 이원필(李源弼) 근서(謹書)
전의이씨(全義李氏) 반학정공파종중(伴鶴亭公派宗中) 근수(謹竪)

​자료제공 : 성균관유도회 총본부
              부회장 이국로(李國魯)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崔鍾東)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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