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19.04.21 (일)

현풍곽씨(玄風郭氏) 모례정(慕禮亭)

주간고령 편집부 2019-01-14 (월) 23:32 3개월전 88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모례정(慕禮亭) 유래(由來)
(1) 모례정(慕禮亭)은 원래 ‘포산오현지일(苞山五賢之一)’로 일컬어진 예곡(禮谷) 곽율(郭)의 학덕(學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과 성균관 진사, 향중(鄕中) 사림(士林)들이 1839년에 예곡재(禮谷齋)란 이름으로 쌍림면 월막리에 건립하여 향사(享祀)하였으나
(2) 오랜 세월 풍우(風雨)로 멸실(滅失)된 것을 1957년 11월 14일 후손들이 모례정(慕禮亭)으로 개명(改名)하여 현 위치인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월막길 32-11(월막리 114번지)에 지은 재실(齋室)이다.
(3) 모례정(慕禮亭)이라 편액(扁額)함은 예곡(禮谷) 곽율(郭)의 자손(子孫)과 향중(鄕中) 사림(士林)들이 그의 학덕(學德)과 충절(忠節)을 오래토록 우러러 받들고 기리고자 함이라.
2. 건축형태
모례정(慕禮亭)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좌측 2칸과 우측 1칸은 온돌방을 만들고 그 사이의 1칸은 대청을 놓았다. 전면 길이 방향으로는 길게 반 칸의 마루를 내었다.
3. 곽율(郭)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자는 태정(泰靜)이며 호는 예곡(禮谷)이다. 수의부위(修義副尉)을 지낸 아버지 지인(之仁)과 현감(縣監)을 지낸 세은(世殷)의 딸인 어머니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3남으로 중종 26년(1531년) 10월 14일 현풍(玄風) 소례(率禮)에서 태어났다. 남명(南冥)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낙천(洛川) 배신(裴紳)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학문을 논도(論道)하였다. 학행(學行)이 뛰어난 현풍 출신의 다섯 인물로 김굉필(金宏弼), 곽승화(郭承華), 곽율(郭), 배신(裵紳), 원개(元凱)를 가리키는 데 공은 ‘포산오현지일(苞山五賢之一)’로 일컬어진다. 명종 때에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물리칠 때 영남의 여러 선비들이 공을 소수(疏首)로 추대한 것은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종 13년(1558년)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급제한 뒤, 1572년 성균관의 천거로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노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원하여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으로 전직되었다가 1585년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을 역임하고 1585년 학행(學行)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특진되었다. 이어 홍산현감(鴻山縣監)에 제수되어 6년간 민심(民心)과 문풍(文風)을 순화(醇化)시킨 공로가 있어 왕명(王命)으로 표리(表裏) 한 벌을 받았으며 홍산 현민(縣民)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취임한지 월여(月餘)만에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전임(轉任)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9일 초계가수(草溪假守)으로 임용되어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 설악(雪壑) 이대기(李大期) 등 의병장과 합세하여 왜군을 물리쳤으며 특히 의병군에게 군수물자(軍需物資)를 공급하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6월 22일부터 낙동강과 황강(黃江), 사막진(沙幕津)에서 왜선을 여러 차례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동년 9월 초계군수(草溪郡守)로 유임(留任)되어 오로지 충의(忠義)로서 일야(日夜) 전수지계(戰守之計)를 세우고 적기에 장정을 조련(調練)시켰으며 연철(鉛鐵)을 사모아 전구(戰具)와 창검(槍劍)을 만들고 또 순찰사(巡察使)에 청하여 지략(智略)있고 용맹(勇猛)한 장수를 불러서 군병(郡兵)을 통솔케하여 강우(江右) 지역의 보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전란(戰亂) 중 너무 과로하여 선조 26년(1593년) 4월 13일 초계의 관사(官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이었다. 숙종 21년(1695년)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가 중폐(中廢)한 후 1990년 현풍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경덕사(景德祠)를 창건하여 제향(祭享)하고 있다.
(註釋) 소수(疏首)
조선 시대에 연명(連名)으로 상소를 올릴 때 제일 먼저 이름을 적는 우두머리.
4. 모례정기(慕禮亭記)
이 정자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에 있으며 그 이름이 모례(慕禮)라 하니, 예곡(禮谷)선생 곽공(郭公)을 위해 지은 것이라. 이 정자를 지은 이들은 누구인가? 공의 모든 후손이라. 공이 현풍(玄風)에서 태어나 초계현(草溪縣) 관사(官舍)에서 돌아가시니, 그 무덤이 고령의 용담(龍潭)위에 있다. 자손들이 산소를 수호함에 편리한 것 때문에 월막리에 거주함이 이미 200년이 지났으니 대저 월막은 용담과는 이웃이다. 그러므로  집안이 대대로 청빈(淸貧)하여 의문(儀文)을 갖추지 못하여 경영한지 오래되어 비로소 이 일을 만들어 사손(嗣孫)인 동수(東洙)와 후손인 동락(東樂)이 나의 집에 방문하여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대저 공은 젊어서 남명(南冥)선생에게 나아가 스승으로 섬기며 경의(敬義)의 학문에 종사하고 한강(寒岡), 동강(東岡) 선생 등과 여러 현인(賢人)들과 함께 갈고 닦아 덕기(德器)를 이루었더니 얼마를 지나 천거(薦擧)로 관직을 제수(除授)하여 여러 번 군현(郡縣)에 시험(試驗)하니 치적(治績)이 일도(一道)에서 제일이었다. 감사(監司)가 옷 한 벌을 보내 권면(勸勉)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초계군수(草溪郡守)가 되었더니 이때에 개연(慨然)히 몸을 잊고 순국(殉國)할 뜻을 두고,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독려하여, 적을 무수히 참살(斬殺)하니, 왜적이 강우(江右)를 범하지 못한 것은 공의 힘이 많았으므로 학봉(鶴峰) 김문충공(金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이 크게 칭찬하였다. 당시에 사방의 유민(流民 : 일정한 거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초계 고을에 모여서 굶주려 배부름을 구하는 이들이 관청 마당에 가득하거늘 공이 심려(心慮)를 다해 어루만지고 구휼(救恤 : 구제)하며, 책상에 앉아 궁리하며 먹지 못한 것이 여러 번이더니, 마침내 피곤으로 인해 병이 되어 돌아가시니, 전쟁이 어수선함으로 인해 관곽(棺槨 : 널)을 고향에 모시지 못하고 드디어 이곳에 장사(葬事)하였다고 한다. 현풍곽씨(玄風郭氏)는 대대로 충효(忠孝)를 신화(薪火 : 횃불)로 삼아 존재(存齋) 충렬공(忠烈公) 곽준(郭逡)과 망우당(忘憂堂)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에 이르러 더욱 크나큰 충절(忠節)과 많은 공훈(功勳)이 나라에 드러나니 공은 존재(存齋)의 삼종형(三從兄)이며 망우당(忘憂堂)은 공의 삼종형(三從兄)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그 혁혁한 명성(名聲)은 혹은 존재(存齋)와 망우당(忘憂堂) 두 분에게 양보하나 집안에 거처하며 효우(孝友)하는 행실과 관직에 계시며 청렴(淸廉)한 실정(實情)과 어려움을 당하여 충성을 바치는 충절은 하나의 같은 규범(規範)에서 나온 것이라. 현풍에 예전에 오현(五賢)이란 말이 있으니 공이 그 중에 한 분이시다. 후에 사림(士林)이 도동서원의 별묘(別廟)에 봉향하였으니 없어지지 않는 공의(公議)와 높여 무궁하게 보답하여 높이려는 마음을 볼 수 있다. 이 정자를 지은 것은 자손들이 추원(追遠)하는 떳떳한 일로 또한 세속(世俗)이 다 함께 그렇게 여기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 공이 솔례(率禮)에서 태어났으니 아호(雅號)를 예곡(禮谷)으로 한 것은 이 때문이며 이 정자에 의의(意義)를 취함이 또한 예의(禮義)에 있을 것이다. 대저 예(禮)라는 것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며, 인사(人事) 의칙(儀則)이라. 사람으로서 스스로 예를 다한다면 인의(仁義)와 충효(忠孝)가 그 속에 있고 온갖 선행(善行)이 갖추어질 것이라. 무릇 자손이 되어 모두 이에 힘써야할 것이니 하물며 곽씨(郭氏)들은 충효(忠孝)를 대대로 전하는 법으로 삼는 이들이 어찌 잠간이라도 예의(禮儀)를 버리겠는가?  아! 지금의 세상에 인륜(人倫)의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있어 예의가 더욱 심하니 만일 예(禮)를 좋아하는 군자가 있다면 장차 이 정자로 삭양(朔羊)으로 삼아야할 것이라.
신축년(1961년) 4월 도주(道州) 김재화(金在華)는 기록하고 서흥(瑞興) 김희연(金熙淵)은 쓰다.
(註釋)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며, 인사(人事) 의칙(儀則)이라
• 天理之節文(천리지절문)
예(禮)의 근거는 천리(天理)에서 비롯되었고 천리(天理)는 자연의 법칙을 뜻하며 절문(節文)은 조절해서 표현한다는 의미로, 자연의 법칙을 인간사(人間事)에 적용하여 표현한다는 뜻이다.
• 儀則之度數(의칙지도수)
예(禮)의 근거가 천리(天理)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이 인간사(人間事)에 적용되었을 때는 의칙(儀則), 곧 인간 개개인의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에 행동할 때 지켜야 할 도수(度數)라고 한 것이다. 도수(度數)는 규칙으로 정해진 일정한 수를 의미한다.
(註釋) 삭양(朔羊)
《논어(論語)》 팔일장(八佾章)의 자공(子貢)이 초하루에 조묘(祖廟 : 선조의 묘)에 바치던 생양(牲羊 : 희생이 되어 제물(祭物)로 바쳐지는 양)을 없애 버리려고 하자, 공자가 나무라기를, “사(賜 : 자공의 이름)야! 너는 그 생양을 아깝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 예교(禮敎 : 예의에 관한 가르침)가 없어짐을 안타깝게 여긴다.[子貢 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라고 한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것으로 곧 구례(舊禮) 또는 형식적인 허례(虛禮)라도 짐짓 없애지 않고 보존함을 가리킨다.
5. 모례정(慕禮亭) 상량문(上樑文)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노니 해범(楷範 : 모범)은 높은 산과 같이 우러러보니, 추모(追慕)하는 마음 자손이 더욱 간절하고 정령(精靈 : 영혼)은 땅을 파서 물을 얻듯 받드니 이것이 어찌 향사(鄕社 : 사당)와 차이가 있겠는가? 이로서 집을 지어 공경히 관첨(觀瞻 : 여러 사람이 우러러봄)을 표(表)하노라. 공손히 생각하니 예곡(禮谷) 선생은 실로 포산(苞山 : 현풍의 옛 지명)의 기구(耆舊 : 덕망있는 늙은 신하)로다. 서업(緖業 : 선조 때부터 이어온 가업)을 대대로 전하여 청백(淸白)의 명문(名門)에서 태어나셨고 학문은 연원을 접하여 일찍이 남명의 지결(旨訣 : 스승의 중요한 뜻)을 복종(服從)하였네. 조심하시는 평소의 행실은 효우(孝友)와 공겸(恭謙 : 공손하고 겸손함)이 아님이 없고 많은 이들을 도의(道義)로 사귐은 모두가 대현(大賢 : 매우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며 석덕(碩德 : 덕이 높은 사람)이라. 이미 신실(信實)함이 안으로 충족하여 스스로 빛남이 밖으로 펼쳐졌네. 명망(名望)이 날로 높으니 자주 관청의 추천을 받았고 경륜(經綸)을 잠시 시험하여 비로소 우역(郵驛 : 찰방)에 나아가 다스렸네. 군부(郡府 :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를 역임하여 학문을 일으키고 백성을 자애(慈愛)하는 정을 다하였고 왜란을 당하여 병기를 수선하고 적을 막을 방책을 가만히 수련하였네. 감사(監司)는 청평(淸平 : 세상이 태평함)으로 포창(彰)하였고 초유사(招諭使)는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 사랑하는 것을 장려하였네. 염래(廉來)에 대해 어찌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겠는가? 옛날 순리(循吏 : 법에 따라 성실하게 근무하는 관리)만 그 아름다움 독차지한 것은 아니네. 구순(寇恂)을 1년만 더 빌려 달라 소원하였으나 백성들 갑자기 의지할 곳 잃은 것 어찌하나? 행장(行狀)은 어진 사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상세히 하고 무덤은 사유(師儒 : 사람에게 도(道)를 가르치는 유자(儒者))의 글월을 걸어두니 그 믿음이 빛나도다. 오직 이 고령은 산소아래 고을이라. 다시 후손들이 세거(世居)하는 곳이 되었도다. 강 건너 고향의 의연(依然 : 전과 다름 없음)한 마을을 바라볼 수 있고 고갯마루의 산소는 상로(霜露 : 서리와 이슬)를 밟을 때 슬픈 마음을 일으키네.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철향(輟享 : 제사지내는 것을 그만둠)으로부터 사림(士林)들이 공경하는 마음 펼칠 곳이 없고 거듭 문물(文物)의 천역(遷易 :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바뀌고 변함)을 겪어 전고(典故 : 전례가 되는 고사)가 거의 강명(講明 : 연구하여 밝힘)하지 못하게 되었네. 이에 동족(同族)과 상의하여 비로소 새로운 재사(齋舍)를 지었네. 몇 해의 정성으로 물을 기를 샘은 깊은데 두레박줄이 짧은 것을 얼마나 근심하였던가? 주손(冑孫)이 분발하여 마침내 벼리(모든 인간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과 규범)를 들면 눈이 펼쳐지는 것을 보겠네. 음양의 길지(吉地)에 측량대(測量臺)를 정리하여 수고롭지 않게 올라갈 수 있고 원근(遠近)의 좋은 목수(木手)에게 재목을 가려 쓰게 하니 스스로 규모에 알맞았네. 어느덧 며칠이 되지 않아 이루어지니 진실로 백년의 은택(恩澤)이로다. 운곡(雲谷 : 朱子)과 렴계(濂溪 : 周敦)가 이미 편액(扁額)한 것을 생각하면 누가 마땅치 않다고 하겠는가? 우공(于公) 왕씨(王氏)의 후손이 창성(昌盛)함은 부절(符節)을 잡고 반드시 기다릴 만 하리라. 나아가 추창(趨蹌 : 예도(禮度)에 맞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걸어감)하는 선비들 아름다운 화수(花樹)를 다투어 기뻐하고 그림 같은 강산(江山) 즉 월막(月幕)은 모두 죽포(竹苞 : 대나무가 무성함)의 좋은 송축(頌祝)에 들어왔네. 비록 이 글월을 지을 사람이 아니기에 부끄러우나 대대로 전해온 우호(友好)를 밝히니 어찌 감히 사양하리요? 아랑이 대들보를 동녘으로 들어보니 가천(伽川)에서 오는 물이 활수(活水)의 근원과 통하네. 회연(檜淵)에서 바로 고반(考槃)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당년(當年)에 여택(麗澤)을 함께한 것을 알겠네. 아랑이 대들보를 남녘으로 들어보니 땅이 팔계(八溪 : 합천 초계의 옛 지명)에 이웃하여 한 길로 뻗어있네. 공관(公館)에서 돌아가신 일이 옛일로 전하니 아직도 은혜의 교화(敎化)로 남아있어 사민(四民)이 그리워하네. 아랑이 대들보를 서녘으로 들어보니 송림(松林)의 무덤에 풀이 무성하네. 어진 자손들 계술(繼述 : 조상이 남긴 뜻과 사업을 잘 받들어 계승함)하여 음덕(蔭德)을 받아 다시 매림서원(梅林書院)에 모시고 있구나. 아랑이 대들보를 북녘으로 들어보니, 높디높은 미숭산(美崇山)은 고금(古今)이 같은 빛이라. 반룡사(盤龍寺)에서 강도(講道)하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을 추억하니 귀문(貴門)에 법도(法度)가 있음을 많이 말씀하셨네. 아랑이 대들보를 위로 들어보니 하늘의 태양은 삼라(森羅)의 형상(形象)이라. 마음으로 이곳에서 상제(上帝)를 대하니 이곳에 마침내 넓고 밝은 땅을 열었네. 아랑이 대들보를 아래로 들어보니 예전부터 재야(在野)의 현인(賢人)이 얼마나 많았던가? 대기(大器 : 위대한 인물)가 본래 백리재(百里才)가 아니면, 천석(泉石 : 산수의 경치)에 소요(逍遙 : 슬슬 거닐어 돌아다님)하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上樑)한 후에 땅의 도리(道理)는 상서(祥瑞 : 경사롭고 길한 징조)를 드러낼 것이며 하늘의 마음은 회복함을 보일 것이라. 이제 아마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풍도(風度 : 풍채와 태도)가 이에 크게 일어날 것이로다. 처(處)한즉 지킴이 있어야 하고 나간즉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선비는 공경하여 뜻은 이윤(伊尹)의 뜻으로 하고 배움은 안연(顔淵)의 학문을 본받으며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예악(禮樂)을 좋아하는 고을에는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문명(文明)이 돌아오리라.
문소(聞韶 : 義城) 김황(金榥)은 삼가 짓고 서흥(瑞興) 김희연(金熙淵)은 쓰다. 
(註釋) 염래(廉來)
주왕(紂王)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받았던 간신(奸臣) 부자(父子)인 비렴(飛廉)과 악래(惡來)이다.
(註釋) 구순(寇恂)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명장(名將)이다. 영천(穎川)에 도적떼가 일어나자 구순이 영천 태수로 부임하여 안정시켰다. 그 후 광무제를 따라 이 지역을 다시 지나게 되었는데 영천 백성들이 길을 막고 말하기를, “원컨대 폐하에게서 다시 구순을 1년간 빌리고자 하노이다.[願從陛下復借寇一年]” 하였다. 이에 구순을 머무르게 하여 백성들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고 한다.
(註釋) 우공(于公) 
한(漢) 나라 우정국(于定國)의 아버지 우공(于公)이 대문을 높이 세우면서 자손 중에 자신의 음덕(陰德)으로 귀하게 될 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정국(定國)이 승상(丞相)이 되고 영(永)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는 ‘고문성사[高門盛事]’의 고사(故事)가 전해 온다.
(註釋) 왕씨(王氏)
수(隋)나라 용문(龍門) 사람으로 시호는 왕통(王通)이다. 시(詩)·서(書)·예(禮)·역(易)에 통달, 스스로 유자(儒者)임을 자부하고 강학(講學)에 힘을 쏟음으로써 문하에서는 당의 명신(名臣)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齡) 등이 배출되었다.
(註釋) 부절(符節)
사신(使臣)이 신표(信標)로 가지던 옥이나 대나무로 만든 부신(符信)을 말한다.
(註釋) 회연(檜淵)에서 바로 고반(考槃)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당년(當年)에 여택(麗澤)을 함께한 것을 알겠네
회연(檜淵)은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향사하는 회연서원(檜淵書院)을, 고반(考槃)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기리던 고반정사(考槃精舍)를 뜻한다. 두 분 모두 조식(曺植)의 문하의 ‘남명오현(南冥五賢)’으로서 함께 서로 도와 학문(學問)과 품성(品性)을 닦았던 사실을 말한다.
(註釋) 백리재(百里才)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기에 적당한 자질의 소유자로 군수(郡守)의 별칭이다.
(註釋) 이윤(伊尹)
은(殷, 商)나라 초기 사람으로 탕왕(湯王)을 도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난세를 평정한 뒤에 선정을 베푼 상(商)나라의 명재상(名宰相)이다.
(註釋) 안연(顔淵)
중국 노(魯)나라의 현인(賢人)으로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였으며 학문과 덕이 높아서, 공자도 그를 가리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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