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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정자와 재실의 유래를 찾아서

주간고령 편집부 2018-12-16 (일) 21:33 4개월전 87  


창녕조씨(昌寧曺氏)  봉강(鳳岡) 조상(曺塽) 후송재(後松齋)

 

정자(亭子)는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玩賞)하는 심리적 공간이며 재실(齋室)은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종사(宗事)를 논의하는 종회(宗會)의 장소이다.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고령지역의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의 유래를 격주 간격으로 연재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정자(亭子)와 재실(齋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1. 후송재(後松齋) 유래(由來)

(1) 개항기(開港期)의 학자 봉강(鳳岡) 조상(曺塽)의 문하생들이 삼일계(三一契)를 모아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고 동문(同門)의 우의(友誼)를 돈독히 하고자 봉강(鳳岡)이 살아 있는 동안 1938년도에 다산면 벌지리 10길에 건축한 서재(書齋)이자 강학소(講學所)이다.
(2) 후송재(後松齋)라고 짓게 된 연유(緣由)는 덕천(德泉) 성기운(成璣運)이 지은 후송재(後松齋) 기문(記文)에 의하면 “소나무는 추운 겨울 눈보라가 치는 뒤에 까지 푸름을 잃지 않고 굳은 절개를 지키는 속성(屬性)이 있다고 하여 즉 ‘후송(後松)’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는 공이 소나무처럼 절의(節義)를 지키면서 학문을 하는 곳이라는 뜻도 은유적(隱喩的)으로 포함되어 있다.

2. 건축형태
(1) 경사지(傾斜地)에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후송재(後松齋), 하단에는 평삼문(平三門)이 서북향을 향하여 건립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2) 후송재(後松齋)로 올라가는 디딤돌에 새겨진 아름다운 꽃모양 등 추상문양(抽象紋樣)이 특이하다.  

3. 후송재(後松齋) 경내(境內) 현황
후학들의 모임인 삼일계(三一契)에서 세운 ‘봉강(鳳岡) 선생 창녕조공(昌寧曺公) 송덕비(頌德碑)’가 서있다. 후송재 옆에는 종조부(從祖父)이신 학산(學山) 조을환(曺乙煥) 선생 추모비(追慕碑)가 있다.

4. 봉강(鳳岡) 조상(曺塽)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字)는 문보(文甫)이고 호(號)는 봉강(鳳岡)이다. 처사(處士) 정환(珽煥)과 무헌(武憲)의 따님인 옥산장씨(玉山張氏)사이에서 병자(丙子) 1876년 7월 13일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서 태어났다. 공의 나이 10세 때 부친의 명(命)에 따라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에 대한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실천하여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으며 스승은 칠조훈(七條訓)인 “입지지대(立志之大), 입심지정(立心之正), 진실심지(眞實心地), 과실필개(過失必改), 절문근사(切問近思), 독서통투(讀書通透). 변화기질(變化氣質)” 등을 써주면서 학문적 성취를 격려하였다. 임재(臨齋) 선생이 별세한 후에 전북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계화도(界火島)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던 조선 후기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청하며 예폐(禮幣)를 올리고 경의를 표하는 집지(執贄)를 청하는 서신을 올려 1917년 답신(答信)을 받고 42세에 간재(艮齋)의 문하생(門下生)이 되어 성리학의 진원(眞源)을 듣고 경(敬)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義理), 실천(實踐), 극기(克己), 함양(涵養)”에 관한 사조훈(四條訓)을 받아 실천하는데 전력(專力)하였다. 아울러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과 부모가 낳으시고 임금이 먹이시고 스승이 가르치시니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삼사일(生三事一)’을 강조하였다. 공은 수도론적(守道論的) 출처의리(出處義理)를 고수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 자신이 세상으로 나가기보다는 숨어 살면서 의리(義理)를 지키고 도(道)를 전수(傳授)하는 것을 당시의 상황에서 필요한 출처의리(出處義理)로 보아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국화지은일자(菊花之隱逸者)’로 비유하였다. 간재(艮齋)가 계화도(界火島)로 들어가 은둔하여 옛 것을 지키면서(去之守舊) 출처의리(出處義理)하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하였다. 봉강(鳳岡)의 출처의리(出處義理)는 바로 학문연구(學問硏究)와 후진양성(後進養成)으로 이어졌다. 또한 학문은 자기 수양을 통한 참된 인간의 완성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사교론(四敎論)’에서 전통적인 유학의 교육내용이었던 시서예락(詩書禮樂)의 공부에 대하여 강조하고 사교(四敎)를 네 계절에 분속(分屬)시켜 락(樂)은 화창한 소리이니 봄에 마땅하고 시(詩)는 발양(發揚)하는 것이니 여름에 마땅하고 예(禮)는 닦아서 이루는 방법이니 가을에 마땅하고 서(書)는 거두어 간직하는 것이니 겨울에 마땅하다는 공부방법을 논하였다. 이러한 공부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독서(讀書)와 궁리(窮理), 역행(力行)의 모든 것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공은 율곡(栗谷)과 우암(尤庵)의 심성론(心性論)을 수호, 발전시킨 간재(艮齋)의 성리설(性理說)을 대변하여 ‘심즉이심성일물변(心卽理心性一物辨)’이란 글을 통하여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심성일물설(心性一物說)’을 비판하였다. ‘성리도설(性理圖說)’을 통하여 천(天), 성인(聖人), 군자(君子), 소인(小人)으로 권역(圈域)을 구분한 것은 기(氣)의 청탁수박(淸濁粹駁)에 의한 것으로 기질변화(氣質變化)를 통해 소인(小人)은 군자(君子)로 군자는 성인(聖人)으로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변화기질(變化氣質)의 수양론(修養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경천애인설(敬天愛人說)’을 지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서경설(鋤說)’에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제거해야 함을 약초인 방풍(防風)밭의 김매는 것에 비유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물(四勿). 사절(四絶), 구사(九思), 구용(九容)을 제시하였다. ‘혈기잠(血氣箴)’에서 모든 재앙(災殃)의 출발은 혈기(血氣)를 조절하지 못함에서 기인(基因)하였다고 보고 혈기를 조절하여 중화(中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학문과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봉강(鳳岡)의 예설(禮說)은 기본적으로 예법(禮法)의 기본원칙을 지키면서 인정(人情)을 따른다는 예(禮)의 기본정신에 충실한 입장에 있었다. 봉강(鳳岡) 선생의 삶과 학문은 난세(亂世)에 유학의 도(道)를 수호하고 속세(俗世)에 전수(傳授)해 주려는 수도(守道)와 전도(傳道)에 그 중심이 있었다. 항일 유학자 시암(是菴) 이직현(李直鉉),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 등 선현(先賢)을 따르고 당대의 명유(名儒)이었던 긍재(兢齋) 이병운(李柄運), 덕천(德泉) 성기운(成璣運),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고암(苦庵) 이종익(李鍾翼), 덕암(德庵) 박순호(朴純鎬) 등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門人)과 교유하였다. 공에게 수학(受學)한 김재철(金在哲), 조긍환(曺兢煥) 등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 동문간(同門間) 우의(友誼)를 돈독하게 하고자 생시(生時)에 삼일계(三一契)를 모아 1938년 강학소(講學所)인 후송재(後松齋)를 건축하여 매년 후학들이 정읍례(庭揖禮)를 행하였다고 한다. 삼일(三一)이란 《國語(국어) 晉語(진어)》에 이르는 바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미(意味)로 부모와 임금과 스승을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의리(義理)를 말하는 것이다. 즉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도리를 말한다. 현재 후송재(後松齋)는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자산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의 생시(生時)에 제자들이 봉강문집(鳳岡文集) 2권을 간행하였는데 2012년 증손 택상(澤相)이 독담(獨擔)으로 한글번역본을 반질(頒帙)하였다. 을유(乙酉) 1945년 10월 9일 수(壽) 70세로 기세(棄世)하여 묘는 용악(龍岳)의 따님인 초취(初娶) 충주석씨(忠州石氏)와 고령군 다산면 송곡촌 뒤편 고묘(考墓) 좌상(左上) 인좌(寅坐)에 합폄(合窆)이며 재취(再娶)는 나주임씨(羅州林氏)로 공의 묘소 아래 간좌(艮坐)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이 근찬(謹撰)하였고 2012년 입춘절(立春節)에 후학(後學)들이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고자 성균관 관장 최근덕(崔根德)이 근찬(謹撰)하고 성균관 부관장겸전례위원장 강동숙(姜東琡)이 근서(謹書)한 ‘봉강선생창녕조공송덕비(鳳岡先生昌寧曺公頌德碑)’를 세웠다. 공은 주류가 아닌 퇴계학파(退溪學派)가 아닌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았으나 탁월한 학문적 성취(成就)로 사림(士林)으로부터 추앙(推仰)을 받았다.  
(註釋1) 칠조훈(七條訓) 해설
• 입지지대(立志之大) : 뜻 세우기를 크게 하라
• 입심지정(立心之正) : 마음 세우기를 바르게 하라
• 진실심지(眞實心地) : 마음을 진실하게 하라
• 과실필개(過失必改) : 과실(過失)을 반드시 고치라
• 절문근사(切問近思) :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데서 생각하라
• 독서통투(讀書通透) : 글을 읽어 사리(事理)를 뚫어지게 깨달아 환하게 하라
• 변화기질(變化氣質) : 기질(氣質)을 다르게 변화시켜라                 
(註釋2) 예폐(禮幣)
공경(恭敬)하는 뜻을 표(表)하기 위하여 예로써 주는 물건을 뜻한다
(註釋3) 집지(執贄)
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볼 때에 폐백(幣帛)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고 문인(門人)이 되는 것을 말한다.
(註釋4) 국화지은일자(菊花之隱逸者)
국화는 다른 꽃보다 늦게 피어 서릿발을 잘 견뎌 이기는 것으로, 은자(隱者 : 산야에 묻혀 숨어 사는 사람) 같은 풍격(風格 : 풍채와 품격)이 있음을 이름.   (註釋5) 사물(四勿) → 인(仁)의 실천을 위한 네 가지 조목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非禮勿視), 듣지 말며(非禮勿聽),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유교(儒敎)의 네 가지의 금(禁)하는 가르침.  (註釋6) 사절(四絶) → 네 가지 절대적인 금지사항  
억측을 갖는 일이 없고(毋意), 기필코 해야 한다는 일이 없으며(毋必), 고집부리는 일도 없고(毋固), 자신만을 내세우려는 일도 없다(毋我).
(註釋7) 구사(九思) → 군자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아홉 가지 생각
① 항상 눈에 가림이 없이 밝게 볼 것(視思明)
② 항상 소리를 똑똑하게 들을 것(聽思聰)
③ 항상 온화하여 성낸 빛이 없도록 할 것(色思溫)
④ 항상 외모를 단정히 할 것(貌思恭)
⑤ 항상 믿음이 있는 말만 할 것(言思忠)
⑥ 항상 일을 공경하고 삼갈 것(事思敬)
⑦ 항상 의심쩍은 일은 선각(先覺)에게 물어 알 것(疑思問)
⑧ 항상 분한 일이 있을 때는 사리(事理)를 따져서 참을 것(忿思難)
⑨ 항상 재물(財物)을 얻게 될 때 의(義)와 이(利)를 구분하여 취사(取捨)를 가릴 것(見得思義)
(註釋8) 구용(九容) → 군자로서 취해야 하는 아홉 가지 자세
①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라는 뜻이다(足容重)
② 손가짐을 공손히 하라(手容恭)
③ 눈가짐은 단정히 하라(目容端)
④ 입은 조용히 가지라(口容止)
⑤ 말소리는 조용히 하라(聲容靜)
⑥ 머리 가짐을 항상 곧게 하라(頭容直)
⑦ 숨쉬기를 정숙히 하라(氣容肅)
⑧ 설 때는 덕스럽게 하라(立容德)
⑨ 얼굴 모습은 장엄하게 하라(色容莊).
(註釋9) 정읍례(庭揖禮)
조선후기, 서원이나 서당들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인사하고 배운 바를 점검하는 의식이다.                                 

5. 후송재(後松齋) 기문(記文)
어느 날 김재철(金在哲), 조긍환(曺兢煥)이 나에게 서신(書信)을 보내어 이르기를 금년 봄에 저희들이 스승을 위해 옛 성산(星山)의 남동쪽 송곡리에 서재(書齋)를 지어 현판을 후송재(後松齋)라 하고 기문(記文)하기를 원한다 하니 그 스승은 곧 나의 동문학(同門學) 친구인 조봉강(曺鳳岡) 이름은 상(塽), 자는 문보(文甫)이다. 의리상 글을 하지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어 이에 말씀하기를 무릇 초목과 화훼(花卉)의 이름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니나 덕(德)으로 쓴다면 근본(根本)이 굳고 중심이 비어 있는 대나무가 있고 절개(節槪)로 쓴다면 바르고 곧음을 지닌 잣나무가 있고 향기(香氣)로 쓴다면 가을 강에 깨끗한 연(蓮)과 깊은 골짜기에 아름다운 난초(蘭草)와 서리 아래 걸출(傑出)한 국화(菊花)가 있고 수명(壽命)으로 쓴다면 천년의 구기자(枸杞子)가 있는데 어찌하여 유독 소나무(松)를 취하였는가? 이는 거주지(居住地)의 이름을 인하여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아니하는 뜻을 취한 것이니 또 이치는 하나이라. 소나무의 이치는 대나무(竹)와 잣나무(柏)의 이치이고 대나무와 잣나무의 이치는 연(蓮)과 난초(蘭草)와 국화(菊花)의 이치인데 다만 물(物)의 이치는 편벽(偏僻)하고 막혀서 능히 서로 통하지 못하고 사람은 오행(五行) 즉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특수함을 타고 나서 만물(萬物)이 다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를 들면 나마지는 가히 같은 종류로 미루어서 연구할 것이라. 슬프다. 절의(絶義 : 절개와 의리)는 있고 학문이 없는 자는 있으나 학문만 있고 절의(絶義)가 없는 자는 학문이 아니다. 이와 같이 천지(天地)가 순전한 음기(陰氣)의 시대를 만나 특수하게 서있는 소나무와 같이 되어야 가히 학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알 수 없지만 그대들은 과연 능히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그 받은 바를 변함없이 하겠는가. 내가 일찍 덕사(德社)에서 봉강(鳳岡)을 한 번 만났는데 봉강의 인품이 봄꽃의 고운 것이 없으니 오래된 소나무의 순박한 기(氣)로  뿌리는 굳고 근원은 깊어서 남이 감동하여 사일지성(事一之誠) 즉 아버지와 임금과 스승을 동일하게 섬기는 정성을 얻게 된 까닭은 비록 벽해(碧海 : 짙푸른 바다)와 상전(桑田 : 뽕밭)이 백 번이나 변하는 사이라도 이 후송(後松) 즉 소나무는 추운 뒤에까지 있는 특수함이 있는 일이리오. 그러나 서재(書齋)는 밖에 있는 것이니 물건(物件)이요 학문(學問)은 안에 있는 것이니 이치(理致)라. 물건은 반드시 흥(興)하고 폐(廢)하는 것이 있고 이치는 존재하고 망하는 것이 없으니 다만 이로서 능사(能事)가 되고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되었다고 여기지 말고 나아가고 나아가 함께 학문에 힘써 형체(形體)가 없는 의리(義理)를 수립하면 형체가 있는 물건도 길이 힘입어 폐(廢)함이 없으리라. 또 혹시라도 대부송(大夫松)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註釋) 대부송(大夫松)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서 큰비를 만나 다섯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어 벼슬을 내린 소나무를 말한다.
창산(昌山 : 창녕) 성기운(成璣運)

6. 후송재(後松齋) 명(銘)
나의 친구 조상(曺塽) 문보(文甫)는 일찍부터 임재(臨齋) 서씨(徐氏) 어른 즉 서찬규(徐贊奎) 어른을 섬겨 바른 길은 알았고 뒤에는 우리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성(性) 심(心)의 비결을 묻고 교훈한 제자가 심히 많으니 김재철(金在哲), 조긍환(曺兢煥) 같은 젊은이가 돈을 모아서 계(契)를 만들어 이름을 삼일계(三一契)라 하였다. 여러 해 동안 꾸준히 돈을 불려 원금과 이자가 약간의 금전이 되었다. 성산(星山) 남쪽 거주지인 송곡리(松谷里)에 서재(書齋)를 지어 후송재(後松齋)라고 현판(懸板)하니 대개 겨울이 추운 후에 송백(松柏)을 취한 것이요 또 마을 이름을 인함이라. 김재철(金在哲), 조긍환(曺兢煥) 두 사람이 이미 덕천(德泉) 성기운(成璣運)의 기문(記文)을 얻었고 나에게 와서 상량문(上樑文)을 청하는데 갑자기 부지런한 뜻에 부응(副應)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김(金), 조(曺) 두 사람이 받들지 못하고 또 세상을 떠났으니 이에 슬퍼하며 명(銘)을 지어 그 청하는데 보답하고 문보(文甫)의 상여지통(喪予之痛)을 위로하며 명(銘)을 하여 가로되 
천 길의 의봉산(儀鳳山)이여  맑은 기운 높게 쌓았도다.
넓게 수용하였으니 아래는 송곡마을 있도다.
송곡(松谷)에 사람이 있으니 뜻은 높고 행실은 돈독하도다.
지금 것을 단절하고 옛 것을 배워 뛰어나게 저속(低俗)되지 아니하도다.
골짜기에 나무가 푸르니 송목(松木)임을 알겠도다.
사람과 지역이 서로 걸맞으니 여기를 가려 건축하였네.
혹시라도 이어지지 않음이 없으니 떨어진 우리 도(道)가 다시 회복하리라.
경산(京山) 이종익(李鍾翼)
(註釋) 상여지통(喪予之痛)
공자(孔子)께서 수제자(首弟子) 안자(顔子)가 별세하니 공자께서 하늘이 나를 잃게 하셨다 하시며 애통(哀痛)한 고사(故事)를 말한다.

 

 

자료제공 : 봉강(鳳岡) 조상(曺塽)
             증손 조택상(曺澤相),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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