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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주간고령 편집부 2018-12-16 (일) 21:29 1개월전 56  


청도김씨(淸道金氏) 사정공파(司正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청도김씨(淸道金氏) 사정공파(司正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 김지대(金之岱 : 1190년~1266년)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世孫)으로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김여흥(金余興)의 세째 아들이다. 초휘(初諱)는 중용(仲龍)이고 학문을 힘쓰고 글을 잘하며, 풍모가 헌출하고 깨끗하며 척당(倜儻)하여 큰 뜻을 가졌다. 고종 5년(1218년) 거란(契丹)족이 쳐들어 왔을 때 29세의 나이로 군문(軍門)에 입영(入營)하여, 원수(元帥) 조충(趙沖)을 따라 출정(出征)하였다. 당시 병사들은 방패머리에 기이한 그림을 그려넣곤 했는데 공은 충효쌍수(忠孝雙修)라는 명시(名詩)인 순두시(楯頭詩)를 써넣고 전투에 임하였으며, 큰 공을 거두었는데 그 시에 쓰기를,
 “國患臣之患(국환신지환)
  나라 걱정이 신하의 걱정이요,
  親憂子所憂(친우자소우)
  어버이 근심이 자식의 근심일세.
  代親如報國(대친여보국)
  어버이 근심을 대신받들어 나라에 보국(報國)하면
  忠孝可雙修(충효가쌍수)
  충과 효를 다 닦을 수 있네.” 하였다.
이듬해 3월 개선(凱旋)하여 돌아와서 고종(高宗) 6년(1219년) 을과(乙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니, 규례(規例)에 따라 전주 사록참군(全州司錄參軍)을 제수받았다. 이어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에 제배(除拜)되셨으며, 그후 진주목사(晉州牧使)·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나가셔서 선정(善政)을 베푸셨다. 권력의 핵심인물인 최충헌(崔忠獻)의 손자로서 중(僧) 만전(萬全)의 횡포를 단죄하였다. 고종 30년(1243년) 비서소감(秘書少監), 1247년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로 과거시험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역임하셨으며, 1258년 몽고군(蒙古軍)이 침입하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승진하여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使)를 겸직, 몽고군을 격퇴하고 민심을 잘 다스려 서북 40여성(城)을 안정(安定)시킨 공훈으로 오산군(鰲山君)에 책봉되었다.   1260년 12월에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시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1261년 수태부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원종 7년(1266년) 음력 2월 계사일(癸巳日)에 향년77세로 돌아가셨는데 좌서(坐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고려사 및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 편에 실려 있다. 공은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 김종서(金宗瑞)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 청렴결백한 청백리(淸白吏)로 정사(政事)를 수행했던 재상(宰相)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고려조(高麗朝) 10대 시인(詩人)으로 꼽힌다.
(註釋1) 척당(倜儻)
뜻이 크고 기개가 있음
(註釋2) 순두시(楯頭詩)
방패머리에 남기신 시
(註釋3) 좌서(坐逝)
덕망과 수양이 높은 고승들이 앉아서 꼿꼿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2) 고령군내 청도김씨 파별 분포 현황
고령군내에 청도김씨는 고령입향조 사정공(司正公) 경손(敬孫)의 장자 희(希) 후손은 고령군 개진면 옥산2리 적산(笛山)마을에 계자(季子) 미(渼)의 후손은 성산면 상용리(上龍里)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김선장(金善莊)
시조의 증손(曾孫)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충혜왕 1년(1340년) 충혜왕의 실정을 계기로 조적(曺)의 난이 일어난 뒤 왕이 원나라에 불려갈 때, 대호군(大護軍)으로서 호종(扈從)한 공으로 충혜왕 3년(1342년) 6월 1일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어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을 걸게 하고 그들의 부모와 처는 3등을 뛰어 넘어 작위를 주고, 아들 1명에게 7품직을 줄 것이며,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에게 대신 8품직을 주고, 아울러 토지 100결과 노비 10구를 지급하라”는 은전(恩典)을 받았고, 그해에 신궁(新宮) 건축의 감독관이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왕이 원나라의 사신 대경(大卿)·타적(朶赤) 등에게 구타당하고 압송되자 시종하는 무리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응양군(鷹揚軍)으로서 창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끝까지 호송하였다. 원나라에서도 충혜왕(忠惠王)을 미워하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에게 잡혀 투옥되었으나, 그 뒤 귀국하여 1343년에 원나라로부터 충혜왕을 호종(扈從)한 공로를 인정받아 출신지(出身地)인 청도군(淸道郡)의 지군사(知郡事)가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② 김한귀(金漢貴)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며 아버지는 인수(仁秀)이다. 공민왕 11년((1362년) 동경도병마사(東京道兵馬使)로 삼아 홍건적(紅巾賊)의 재침(再侵)에 대비하였고 정세운(鄭世雲)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경성(京城)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물러나 도솔원(兜率院)에 주둔하였다. 적을 평정하자 대장군 김한귀(金貴漢) 등을 보내어 승리를 알리는 글 즉 노포(露布 : 군대의 승전보)을 받들고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가자 공에게 황금(黃金) 25량과 비단 2필을 하사하였다. 공민왕 12년(1363년) 개경(開京)을 수복한 1등공신(一等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으며 광주도병마사(廣州道兵馬使)로 군사를 징발(徵發)하였다. 공민왕 14년(1365년) 감찰대부(監察大夫)·개성윤(開城尹)·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공민왕(恭愍王) 15년(1366)에  공이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어 청도감무(淸道監務)를 승격시켜 지군사(知郡事)가 되었다. 공민왕 16년(1367년)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에 임명되었다. 후에 광정대부(匡靖大夫)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역임한 후 오산군(鰲山君)에 습봉(襲封)되었고 사후(死後)에 시호는 원정(元貞)이며 고려명현선원각(高麗名賢善元閣)에 두 번째 자리에 배향(配享)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고려사(高麗史) 및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 청도군편에 실려 있다.
(註釋) 오산(鰲山)
고려시대 지금 청도군(淸道郡)의 군명(郡名)은 오산(鰲山)이었다.
③ 김린(金潾 : 1338년∼ ?)
흥위위대장군(興威衛大將軍)을 지낸 한귀(漢貴)와 봉선대부(奉善大夫)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낸 이방계(李芳桂)의 따님인 양성이씨(陽成李氏) 사이에서 충숙왕 7년(1338년)에 태어났다. 국자진사(國子進士) 숙옹부(肅雍府) 행수별장(行首別將)을 지내고 공민왕 9년(1360년) 경자방(庚子榜) 문과(文科)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동방급제(同榜及第)한 후 봉상대부(奉常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註釋) 숙옹부(肅雍府)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비(妃)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음식물(飮食物)을 이바지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아를 말한다.

(2) 조선시대
① 김점(金漸 : 1369년 ∼ 1457년)
호는 의촌(義村)이며 봉상대부(奉常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린(潾)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가 개국 후 고려의 인재를 가려 뽑을 때 위의장군(威毅將軍)으로 천거(薦擧)되어 보공장군(保功將軍) 용기위사(龍騎衛司) 대호군(大護軍)과 지성주사(知成州事)를 지냈다. 태종 11년(1411년)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거쳐 그후 판청주(判淸州)·인녕부윤(仁寧府尹)·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를 역임하였다.  태종 18년(1418년)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세종 1년(1419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받았고 영접사(迎接使)를 지냈다. 그후 호조판서(戶曹判書)·평안도(平安道) 도관찰사(都觀察使)·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평안도(平安道) 도관찰사(都觀察使) 재직 시에 문제가 있었으나 태상왕(太上王) 태종(太宗)과 세종(世宗)이 김포의 집(別業)으로 돌려 보내었다. 그 이유는 그가 4대에 걸쳐 일관되게 충성(忠誠)을 다했다는 점, 그의 부인 영가권씨(永嘉權氏)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모친 권마마와 혈연관계에 있다는 것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세조 3년(1458년) 10월 23일 89세의 나이로 경기도 김포에서 세상을 떠나니 시호(諡號)를 호강(胡剛)이라 하였으니, 장구(長久)한 연한(年限)을 수고(壽考)함을 호(胡)라 하고, 추후(追後)해 전과(前過)를 고쳐 보완(補完)함을 강(剛)이라 한다. 태종 11년(1411년)에 공의 딸이 태종의 후궁(後宮)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숙공궁주(淑恭宮主)이며 태종이 총애(寵愛)하였다.
② 김경손(金敬孫)
호조판서(戶曹判書)·평안도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歷任)한 점(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풍수학(風水學)에 해박하여 광주(廣州)를 상지(相地)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서령(署令) 김경손(金慶孫)을 원종공신2등(原從功臣二等)에 녹훈(錄勳)한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 오위(五衛)에 속하였던 정7품 무관(武官) 벼슬인 사정(司正)을 지냈다.
(註釋) 상지(相地)
땅의 생김새를 살펴 길흉(吉凶)을 판단하는 일을 말한다.
③ 김욱(金澳)
사정(司正)을 지낸 김경손(金敬孫)의 둘째 아들로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으며 세조 1년(1456년) 원종공신2등(原從功臣二等)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사위가 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입향 경위는 자세하지 않으나 4대에 걸쳐 권신(權臣)이었던 선고(先考) 김점(金漸)이 세조 3년(1458년) 졸(卒)함에 따라 혼미(昏迷)한 정국(政局)을 피하여 1460년경 원종공신2등(原從功臣二等)에 녹훈(錄勳)되었던 김경손(金敬孫)이 서울로부터 고령군 성산면 상용리 운교(雲橋) 마을에 입향하였다가 좌우위익(左右衛翊) 용랑장(勇郞將)을 지낸 아들 희(希)가 고령군 개진면 옥산2리 적산(笛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김희(金希)
충무위(忠武衛) 중부사정(中部司正)을 지낸 경손(敬孫)과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개(槪)의 따님인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태조(太祖) 때 의흥친군(義興親軍)의 십위(十衛)에 속하였던 좌우위익용낭장(左右衛翊勇郎將)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김득경(金得敬)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지낸 인수(仁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산(牙山) 차사원(差使員)과 평택현감(平澤縣監)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이러한 사실이 포산지(苞山誌)에 실려 있다.
(註釋) 차사원(差使員)
중요한 임무를 지워 파견하는 임시 관원. 조선 초기에는 오직 관찰사(觀察使)만이 수령(守令)을 차사원(差使員)으로 정하여 파견할 수 있었으나, 차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도 임의로 차사원(差使員)을 차정(差定)하는 경우가 있었다.
③ 김석견(金石堅)
아산(牙山) 차사원(差使員)과 평택현감(平澤縣監)을 지낸 득경(得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승훈랑(承訓郞) 통례문(通禮門) 인의(引儀)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김명(金銘 : 1564년∼1636년)
자는 질지(質之)이며 중추(中樞) 익복(益福)과 현감(縣監)을 지낸 성(星)의 딸 숙부인(淑夫人)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전관(宣傳官)과 진위장군(振威將軍) 행(行)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김대인(金大仁)
선전관(宣傳官)과 진위장군(振威將軍) 행(行) 수문장(守門將)을 지낸 명(銘)과 숙인(淑人) 인동장씨(仁同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판관(判官)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⑥ 김응진(金應津 : 1604년∼1644년)
자는 자윤(子潤)이며 선전관(宣傳官)과 진위장군(振威將軍) 행(行) 수문장(守門將)을 지낸 명(銘)과 숙인(淑人) 인동장씨(仁同張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⑦ 김열(金)
호는 의인재(依仁齋)이며 장사랑(將仕郞) 영숭전(永崇殿) 참봉(參奉)을 지낸 몽식(夢軾)과 훈련원(訓練院) 참봉(參奉) 쇠(釗)의 따님인 의인(宜人)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넓으며 바른 일을 행(行)하여 문하(門下)에 영재지사(英材之士)가 많았다는 사실이 남인집(南寅集)에 실려 있다. 조선시대 정3품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인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냈다. 공은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金沔)의 증조부(曾祖父)로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고령인(高靈人) 김장생(金莊生)의 사위이다. 달성군 유가면 금리(琴里) 청도김씨(淸道金氏) 입향조(入鄕祖)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⑧ 김재욱(金再郁)
자는 여문(汝文)이며 선교랑(宣敎郞)을 지낸 응진(應津)과 부장(部將) 치근(致謹)의 딸 단인(端人)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백부(伯父) 대인(大仁)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⑨ 김재웅(金再雄 : 1650년∼1673년)
자는 영보(永甫)이며 선교랑(宣敎郞)을 지낸 응진(應津)과 부장(部將) 치근(致謹)의 딸 단인(端人)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판관(判官)을 지냈다.
⑩ 김택원(金宅元 : 1806년∼1890년)
자는 연옥(連玉)이며 유학(幼學) 치운(致雲)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겸(兼) 오위장(五衛將) 행(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2) 근∙현대 인물
① 김환석(金煥碩 1936년) : 청도김씨 적산파 종친회 회장
② 김상권(金相權 1937년) : 청도김씨 적산파 종친회 회장
③ 김한수(金漢洙 1940년) : 새마을 개진면회장, 제3대 고령군의회 의원
④ 김점도(金点道 1945년) : 사업가
⑤ 김현철(金鉉喆 1960년) : 경영학박사
⑥ 김영훈(金永勳 1965년) : 컴퓨터 공학박사, 안동과학대학 교수
⑦ 김명국(金明國 1971년) : 고령청년회의소 회장, 제8대 고령군의회 의원

 

 

자료제공 : 전 고령군의회 의원
             김한수(金漢洙),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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