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0.07.08 (수)

전주이씨(全州李氏)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편집부 2020-05-30 (토) 16:17 1개월전 63  


사우재(쌍림면 귀원리 14-5)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始祖) 이한(李翰)
①『선원계보(璿源系譜)』·『태조실록(太祖實錄)』·『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의하면,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21대조로 신라에서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고,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하여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고, 자연은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다.
그 뒤 대가 이어져 안사(安社 : 뒤에《목조(穆祖)》로 추존)-행리(行里 : 뒤에《익조(翼祖)》로 추존)-춘(椿 : 뒤에《도조(度祖)》로 추존)-자춘(子春 : 뒤에《환조(桓祖)》로 추존)-성계(成桂)로 이어졌다. 이한(李翰)의 선대(先代)가 언제부터 전주(全州)에 세거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한(李翰) 이후 전주(全州)에 세거하여 후손들이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② 광무 3년(1899년) 5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전주 건지산(乾止山)에 조경단(肇慶壇)을 쌓고,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를 세우고 시조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10일 시조(始祖) 사공공(司空公) 휘 한(翰)과 시조비(始祖妣)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③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든지, 임금님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어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하는 표현 등은 모두 우리의 독특한 용어라 할 수 있다. 각 본관(本貫)의 시조(始祖) 또는 파조(派祖)는 왕(임금)이 아니라 그 아들 또는 형제를 시조(始祖)로 한다는 사실이다.
④ 시조(始祖)로부터 목조대왕(穆祖大王)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인 양무장군(陽茂將軍)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대왕(穆祖大王)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황제(純宗皇帝)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하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왕자파(王子派) 이후 순종황제의 왕자 군(王子君)까지의 각 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할 수 있다.
⑤ 옛날 전주(全州)의 옛 이름은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 완산(完山)은 원래 전주(全州)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全州府)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2) 전주이씨(全州李氏) 분파(分派)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파는 총 122개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광평군파(廣平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 번창했다.
(3) 전주이씨(全州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전주이씨(全州李氏)는 413가구 1,12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의평군(義平君) 원생(元生) 후손은 개진면 신안리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후손은 쌍림면 귀원리에,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은 우곡면 연동, 덕곡면 백리, 운천군(雲川君) 이인(李寅)의 후손은 쌍림면 평지리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은 개진면 생리에, 의안대군(義安大君) 이양(李穰)의 후손은 쌍림면 송림리에, 담양군(潭陽君) 이거(李) 후손은 대가야읍 내곡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조선시대
①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자는 후백(厚伯)이고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과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제(霽)의 따님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조 3년(1394년) 태어났다. 태종 4년(1404년) 왕세자로 책봉(冊封)되었다.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결국 태종 18년(1418년)에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어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봉해져 폐위되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그 뒤 전국을 누비며 풍류(風流)를 즐겼다.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종과 매우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시(詩), 서(書)에 능하였다. 서울 숭례문(崇禮門)과 경회루(慶會樓) 편액(扁額)이 그의 필적(筆跡)이다. 특히 그는 세조의 집권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단종 1년(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을 때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사사(賜死)를 강력히 주청해 관철시켰고 그후 단종의 사사(賜死)라는 훨씬 중요한 문제에 개입했다. 세조 8년(1462년)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강정(剛靖)이다.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② 함양군(咸陽君) 이포(李)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와 좌찬성(左贊成) 한로(漢老)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종 16년(1416년) 태어났다. 세종 13년(1431년) 통정대부(通政大夫) 원윤(元尹)에 제수되었고, 세종 14년(1432년) 가정대부(嘉靖大夫)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세종 20년(1438년)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오르며 윤(尹)으로 제수되었으며, 세종 23년(1441년) 세종의 총애로 소릉수상관(昭陵守喪官)에 임명되었다. 단종 2년(1454년) 가덕대부(嘉德大夫)에 올랐다. 아버지인 양녕대군을 모셔 온천으로의 피병(避病) 등에 동행하였으며 평소 부친을 잘 보필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부터 ‘내가 과오(過誤)가 적은 것은 함양(咸陽)의 덕(德)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성종 5년(1474년)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를 이안(夷安)이라 하였으니, 마음을 안정하여 고요한 것을 좋아라는 것을 이(夷)라 하고, 화평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였다.
③ 호산군(湖山君) 이현(李鉉)
함양군(咸陽君) 포()와 소윤(少尹) 대(臺)의 따님인 태인군부인(泰仁郡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으며 성종 2년(1471년)에 임금을 잘 보좌하고 정치를 잘 하였다는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성종 7년(1476년) 정의 대부(正義大夫) 호산군(湖山君)으로 삼았으며 승헌(承憲) 겸(兼) 도총관(都摠管)에 제수(除授)되었고 시호(諡號) 소평공(昭平公)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이희손(李希孫)
자는 공망(公望)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현손(玄孫)으로, 보안부정(保安副正) 명선대부(明善大夫) 수남(壽南)과 참봉(參奉) 공저(公著)의 따님인 신부인(愼夫人) 교하노씨(交河盧氏) 사이에서 연산군 3년(1497년) 태어났다. 중종 26년(1531년)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한 후 중종 28년(153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선보(選補)된 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병조좌랑(兵曹佐郞)·함경도사(咸鏡都事)·수원부사(水原府使)·예빈시정(禮賓寺正)·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 17년(1562년) 오위장(五衛將)에 제수(除授)되었다. 명종 21년(1566년) 졸(卒)하였다.
⑤ 이세량(李世良)
자는 중직(仲直)이고 의영고(義盈庫) 봉사(奉事)를 지낸 희년(希年)과 현령(縣令) 춘난(春蘭)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명종 4년(1549년) 태어났으나 종가(宗家)인 이희손(李希孫)에게 계후(繼後)되었다. 제릉참봉(齊陵參奉)을 지내고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둘째 아들 이목(李)이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의 어가(御駕 : 임금이 타던 수레)를 강화도로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어 귀(貴)하게 되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고 손자 이만(李曼)이 도승지(都承旨)·병조참판(兵曹參判)·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여 귀(貴)하게 되자 완릉군(完陵君)에 봉군(封君)되었다.
⑥ 이목
자는 자요(子繇)이고 완능군(完能君)에 봉해진 세량(世良)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주(澍)의 딸인 증정부인(贈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사이에서 선조 6년(1573년)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 38년(1605년)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한 후 광해(光海) 4년(1612년) 식년시(式年試) 몬과에 급제하여 강진현감(康津縣監)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전라도사(全羅都事)·병조정랑(兵曹正郞)·내섬시 정(內贍寺正)·옥천군수(沃川郡守)·제용감 정(濟用監正)·봉상시 정(奉常寺正)·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하였다 인조 25년(1625년)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를 파견할 때 정사(正使) 전식(全湜)과 함께 서장관(書狀官 : 기록관)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인조 13년(1635년)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인조 18년(1640년) 평창군수(平昌郡守)가 되었다. 인조 20년(1642년) 임소(任所)에서 세상을 떠났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광해군 재위기간에 대북파(大北派)에 의하여 자행(恣行)된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 : 아주 깊숙이 가둠)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는 논의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백형 이심(李)이 광해군 15년(1623년) 서인(西人)이 주도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처형되어 집안에 풍파(風波)가 있었던 무렵에 동생인 양녕대군(讓寧大君) 6세손 현와(弦窩) 이도(李)가 인조 2년(1624년)경 문명(文名)이 있었고 의병장(義兵將)과 함양군수(咸陽郡守) 등을 지낸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의 따님과 혼인하면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한 서울 명례방(明禮坊 : 서울특별시 중구 일대)에서 처향(妻鄕)인 초계(草溪) 성산(城山 : 현재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으로 낙남(落南)하여 은둔(隱遁)하다가 고령(高靈) 구담(龜潭) 즉 현재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사재동(書齋洞) 일명 서잿골로 이거(移居)하여 현사대부(賢士大夫)와 교유(交遊)하면서 경전(經傳)과 사기(史記)를 토의하고 논란하며 강마(講磨)하면서 복거(卜居) 정착(定着)하게 되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이도(李)
자는 자소(子韶)이고 호는 현와(弦窩)이다. 완능군(完能君)에 봉해진 세량(世良)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주(澍)의 딸인 증정부인(贈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 사이에서 선조 26년(1593년)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6세손이다.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년) 무오(戊午)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공이 사우(師友)한 이는 동계(桐溪) 정온(鄭蘊), 미수(眉叟) 허목(許穆), 오계(梧溪) 조정립(曺挺立), 기옹(畸翁) 박공구(朴衢), 락수(洛叟) 곽위국(郭衛國), 국포(菊圃) 이문룡(李文龍)과 그의 사위 태허(太虛) 곽홍지(郭弘址) 등 당세(當世)의 명현(名賢)들 이었다. 37세 때인 인조 7년(1629년) 고령의 의병장(義兵將) 송암(松巖) 김면(金沔)과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을 향사하는 향현사(鄕賢祠 : 현재 道巖書院)의 중수기(重修記)를 지었다. 44세 때인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수찬(修撰)에 제배(除拜)된 조카 이만(李曼)이 오랑캐와 화친(和親)할 수 없다고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전 예조참의(禮曹參議) 전식(全湜)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군(淸軍)의 남하(南下)를 저지하려 할 때 공은 초계향병(草溪鄕兵)을 이끌면서 유사(有司)가 되어 군량의 효과적 이용계획을 제시하여 방어 작전을 도왔다. 그는 전식(全湜)에게 “의병대장 전참의(全參議) 식(湜)에게 올리는 글<上義兵大將全參議湜書>”을 올려 영남의병이 성급히 조령(鳥嶺)을 넘다가 군량마저 적에게 빼앗기는 우(愚)를 범하지 말고 지역을 지키면서 관망하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같은 해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권유로 청계서원(靑溪書院) 원장(院長)을 맡았다. 55세 때인 인조 24년(1646년)에 창원(昌原)의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을 거쳐 58세 때인 인조 26년(1648년) 금산(錦山)에서 제원도(濟原道) 찰방(察訪)을 수행하였고 61세 때인 효종 4년(1653년) 안동의 안기도(安奇道) 찰방(察訪)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령으로 돌아왔다. 75세 때 고령 반룡사(盤龍寺)의 종각기(鍾閣記)를 지었다.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14-5번지 구담(龜潭)에 사우재(四友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사우(四友)는 주(周)나라의 노중련(魯仲連),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 송(宋)나라의 호방형(胡邦衡), 신라의 백결선생(百結先生) 등을 뜻한다. 현종 9년(1668년) 향년 76세로 졸(卒)하였다. 유고(遺稿)로 현와선생문집(弦窩先生文集)이 전하는데 약 730여 수의 한시(漢詩)와 약 60여편의 산문(散文)이 수록되어 있다.
② 이경(李景)
자는 행지(行之)이고 안기도(安奇道) 찰방(察訪) 도()와 군수(郡守) 설학(雪壑) 대기(大期)의 따님인 숙인(淑人)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인조 4년(1626년) 태어났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숙종 30년(1704년) 졸(卒)하였다.
③ 이채(李埰)
자는 봉숙(封淑)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경(景)과 장사랑(將仕郞) 정지(晶之)의 따님인 공인(恭人)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효종 8년(1657년) 태어났다. 문학(文學)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가 지극하였고 친구를 도움에 칭탄(稱歎)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숙종 45년(1719년) 졸(卒)하였다.
④ 이석희(李錫禧)
자는 여오(汝五)이고 사인(士人) 채(埰)와 사인(士人) 태안(泰安)의 따님인 포산곽씨(苞山郭氏) 사이에서 숙종 7년(1681년) 태어났다. 숙종 36년(1710년)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하고 영조 11년(1735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영조 9년(1733년)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시작으로 의령현감(宜寧縣監)·결성현감(結城縣監)·아산현감(牙山縣監) 등 외직(外職)과 전적(典籍)·빙고별제(氷庫別提)·익찬(翊贊)·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겸(兼) 지제교(知製敎) 등 내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 19년(1743년) 졸(卒)하였다.
⑤ 이규민(李奎敏)
자는 성옥(成玉)이고 사인(士人) 병용(炳容)과 준우(俊佑)의 따님인 죽산전씨(竹山全氏) 사이에서 헌종 5년(1839년) 태어나 백부(伯父) 대용(大容)에게 출계(出系 : 양자로 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고종 10년(1873년)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입격하였다. 졸년(卒年) 미상(未詳)이다.
(2) 근∙현대 인물
① 이승칠(李承七) : 공학박사, 한진중공업 솔로몬cc사장, 한진도시가스사장
② 이병석(李丙奭) : 조선공학박사, 스트라스크라이드대학 교수
③ 이병훈(李丙勳) : 부산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
④ 이윤기(李閏基) :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선임연구원
⑤ 이명오(李明五) : (사) 한국쌀전업농경북초대회장, 중앙연합회 수석부회장
⑥ 이병주(李丙柱) : 대구시청 공원관리과 토목기사
⑦ 이병수(李丙洙) : 대구시교육청 교장역임
⑧ 이병근(李丙根) : 수정정밀사장
⑨ 이용수(李龍洙) : 봉화군청 과장, 사무관
⑩ 이병철(李丙喆) : 울산대학교 교수, 공학박사
⑪ 이의수(李義秀) : 대구시청 수목관리원 수목관리사(사무관급)

자료제공 : 후손 이병록(李丙綠)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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